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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의 그림자를 따라 걷다

1. 프롤로그

by 전나무


그림자로 시간을 기록하던 사람들이 살던 땅을 여행했습니다.

오래된 해시계 앞에 서면 늘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간을 가리키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품은 조용한 기록이라고요.


해가 어디쯤에서 떠오르던 날인지,

그 바람은 어떤 목소리로 불어왔는지,

그 공간의 공기는 어떻게 살결에 닿았는지,

해시계는 말없이 모든 걸 담고 침묵 속에서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체코 곳곳에서 그런 해시계를 만났습니다.

프라하의 성벽 아래서,

작은 마을의 골목 끝에서,

유네스코에 오른 작은 마을의 벽에서,

수백 년 동안 고요히 시간을 비추던 돌과 그림자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느끼기 위해 그 그림자를 따라 걸었습니다.

그림자의 작은 기울기 안에서

누군가의 오래된 오후와 나의 지금이 포개졌습니다.


여행이란, 결국 시간 위에 발을 디디는 일입니다.

멈추지 않는 흐름 속에서 체온만큼 따뜻한 기억 한 조각을 남기는 것.

아마도 해시계는 그 방법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겠지요.

이번 여행에서 내가 기록하려는 것은 아마도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간 계절의 냄새,

한낮의 그림자 위로 떠오른 생각,

오래된 벽을 쓰다듬으며 손끝에 스며든 지난 세월의 온기,

그리고

그곳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더듬어보는 작은 움직임입니다.


여행이 끝나면 사진은 바래고 기억은 흩어지겠지만

나는 아직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늘을 가늠하며 멈춰 선 시간의 결을 만지듯이요.


예정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상 위 달력은 늘 한 달 전에서 멈춘 상태입니다.

나는 일부러 그 페이지를 넘기지 않습니다.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여행의 조각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여행은, 어쩌면 내 안의 시간을 탐색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체코라는 오래된 시간을 걷고,

그 길에서 건져 올린 마음의 그림자와 빛줄기들을 엮어낸 기록입니다.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곧 시간의 흔적이 되니까요.


여기, 해시계가 남긴 문장들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3년 만에 다시 동행해 준 친구 미숑,

그리고 10년 동안 늘 내 곁을 지켜준 리숑에게

따듯한 마음을 전합니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부데요비체 문의 해시계 (표제 사진은 리토미슐 성의 해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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