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콜린(Kolin)
* 이 글은 프라하 중앙역, 1번 플랫폼에서 알게 된 '니콜라스 윈튼'이라는 영국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우리 내일, 쿠트나 호라는 가지 말고 콜린만 가면 어때? 기차 타고."
"운전도 하루 쉬고, 오랜만에 기차 여행하는 것도 좋지. 그럽시다."
프라하 중앙역 '흘라브니 나드라찌'의 고풍스러운 아르누보 천장이 이른 아침 햇살을 부드럽게 받으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너머로 스며드는 빛, 작은 조각상들은 마치 조용히 지나간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지요.
그곳은 단순한 교통의 허브가 아니라, 제국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프라하 중앙역은 늘 누군가의 이별과 도착으로 가벼운 소란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침, 나는 그 소란 속에서 멈춰 섰습니다.
한 남자와 어린아이들의 조각상 때문입니다.
매달리듯 웅크린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의 옆에는 여행 가방과 여자아이가 서있습니다.
설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기념비쯤으로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아주 묵직한 스토리가 있었지요.
콜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려던 평범한 아침이, 그 순간부터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뒤로 그날 하루가 단순한 도시 방문이 아닌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기차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1938년 12월, 당시 29세의 영국 주식중개인 니콜라스 윈턴(Nicolas Winton)은 스위스로 스키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출발 3일 전, 체코슬로바키아 동부의 유대인 난민캠프에서 일하는 친구 마틴 블레이크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니키, 여행을 취소하고 여기 일 좀 도와주겠나?”
그 캠프는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으로 고향을 잃은 유대인 아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부모와 헤어져 혼자 남은 아이들을 본 윈턴은 충격을 받았고, 즉시 아이들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영국 정부에 아이들을 위한 비자를 부탁하고, 입양할 가족들을 일일이 찾았습니다.
끝없는 서류 작업 속에서도 윈턴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정부의 허가가 떨어졌고, 1939년 3월부터 8월까지 8차례에 걸쳐 총 669명의 아이들이 영국으로 안전하게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9월 3일, 마지막 열차가 출발하기 이틀 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250명의 아이들을 태운 아홉 번째 기차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248명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플랫폼에서, ‘영국의 쉰들러’라 불린 니콜라스 윈턴 경이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후 윈턴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공군에 입대하고 1944년 정식 파일럿이 되었습니다. 1948년 결혼하여 1954년 공군 대위로 전역한 뒤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50년 동안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40년 되던 해인 1987년, 다락방을 청소하던 아내가 빛바랜 아이들 사진과 산더미 같은 서류를 발견하면서 비밀이 밝혀졌지요.
그곳엔 윈턴이 영국으로 입양 보냈던 모든 아이들의 인적 사항을 적은 스크랩북도 있었습니다.
아내의 끈질긴 질문에 그는 마지못해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자신이 한 일을 오랜 세월 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라고요.
1939년 9월 1일, 250명의 아이들을 실은 마지막 열차가 프라하를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열차 운행이 통제되었고 그 아이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고요.
윈턴 경은 구출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비밀을 털어놓은 뒤 그는 아내에게 서류를 없애버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 아이들 삶이 담긴 기록을 그럴 수 없다고 했지요.
이후 1988년 BBC의 프로그램 'That’s life'에 소개되며, 윈턴이 구한 아이들이 직접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윈턴 경은 방청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지요.
MC가 리스트에 적인 이름을 보며 '베라 디만트'씨가 지금 윈턴 씨 옆에 앉아 계십니다.
라고 말하자 윈턴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 MC는 니콜라스 윈턴 씨에 의해 목숨을 구한 분이 계시면 일어나 주세요,라고 말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지요.
그 방송이 나간 후 세계 각지에서 그가 구출한 아이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엔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포함하여 유명인과 사회 지도층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가 구출한 669명의 아이들이 낳은 자녀와 손주까지 합하면 약 6,000여 명에 이른다고 해요.
그렇게 윈턴의 선행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2002년 체코 정부 최고 훈장, 20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윈턴이 아이들을 구한 지 70년이 지난 2009년 9월, 영국 런던의 리버풀 스트리트역에 영화 같은 일이 펼쳐졌습니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 법한 1930년대의 증기 기관차가 역으로 서서히 들어왔습니다.
'윈턴 열차'를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설립되었던 거죠. (그때 프라하 플랫폼의 이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9월 1일 프라하를 떠난 기차는 1939년 당시와 똑같은 경로인 독일과 네덜란드를 경유했습니다.
하리치에서 페리로 환승한 후 다시 기차로 옮겨 타고 4일 동안 달려 영국 런던의 리버풀역에 도착했지요.
기차에는 당시 그 기차에 타고 있던 어린이(70년이 지나 모두 고령의 노인이 되었지만) 22명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윈턴의 딸 등 170명의 특별 손님이 탑승했습니다.
리버풀역엔 이미 백 살이 된 그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토니 블레어(Blair) 전 영국 총리는 윈턴을 '영국의 쉰들러'로 칭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Schindler)는 2차 대전 중 유대인 1,200여 명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로 유명하지요.
"난 쉰들러가 아니다. 쉰들러와 달리, 나는 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은 아니었다"며 여전히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2015년 7월 1일, 윈턴 경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자던 중 106세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별세한 날짜는 1939년 669명의 어린이 중 241명이 기차를 타고 프라하를 떠난 날짜와 같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체코에서 만들어진 2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2024년, 영국에서 만든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의 'One life'가 있습니다.
프라하 중앙역의 플랫폼으로 가는 통로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남겨져 있습니다.
유리창에 찍힌 수많은 손바닥 자국이 있는 특이한 문.
설치 미술이라기엔 너무 뜬금없는 장소였지요.
그또한 윈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1939년 아이들이 탔이 프라하를 떠났던 기차의 문을 본떠 만든 추모 작품입니다.
유리의 안쪽에는 아이들의 손, 바깥 쪽에는 부모님의 손이 새겨져있었지요.
부모와 헤어지는 아이들과 이국 멀리 어린 자식을 보내야만 했던 부모들의 애끓는 울부짓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렇듯 프라하의 플랫폼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 손길과 기억하려는 기록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프라하를 떠난 기차는 또 다른 페이지를 열기 위해 달립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회색빛 지붕들과 강, 그 뒤로 뻗어 있는 초겨울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생각은 자꾸 플랫폼의 그 남자에게 머물렀습니다.
콜린의 카를로브 광장은 마치 작은 마당 같았습니다.
사람 하나 없는 거리, 일요일이라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았고, 체코의 작은 마을 특유의 고요함이 느껴졌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1894 카페 트라디체’는 의외로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련된 인테리어, 은은한 음악, 정성스러운 브런치까지, 여행자들의 마음과 딱 맞는 공간이었지요.
커피는 이탈리아 직수입 블렌드, 플레이팅과 맛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로스팅한 블렌드로 만든 커피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콜린에 온 것이 단지 트라디체의 브런치를 먹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해도 만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이곳에서 잠시 시간을 온전히 느끼라는 초대처럼 느껴졌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 화장실에 들르자, 벽에는 흑백 옛날 지도와 앤티크 한 소품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도 하나를 사고 싶은 욕심이 일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소유의 무게를 알기에 생각을 접을 수 있었지요.
카페를 나와 골목을 걷다 보니, 돌바닥에 작은 황동판이 박혀 있습니다.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종종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마지막 주소가 새겨진 작은 황동판, 슈톨퍼 슈타인(Stolperstein)
이 황동판은 독일 예술가 귄터 뎀니히(Gunter Demnig)가 199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로, 나치에 의해 사라진 유대인과 소수민족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돌 사이에 끼워 놓은 가로 세로 10cm의 작은 동판입니다.
독일어 stolpern(걸려서 비틀거리다)와 Stein(돌)을 합쳐 만든 단어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의도라고 합니다.
판 위에는 새겨진 글은 이름, 출생연도, 마지막 거주지, 추방과 사망연도.
누군가의 삶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여기저기서 그 동판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다르더군요.
살아남게 하기 위해 내민 손길, 잊히지 않으려는 기록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 여행은 이렇듯 역사와 삶을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카페를 나와 바르톨로뮤 교회로 향하는 길은 누구의 발걸음도 크게 새기지 않는 듯 조용했습니다.
도시 중앙에 자리한 교회는 그 자체로 콜린의 중심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안으로 들어서자 고요는 한 층 더 깊어졌습니다.
높은 천장 아래로 내려오는 희미한 빛,
가벼운 발걸음에도 작게 울리는 바닥의 떨림,
그리고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성상들.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지켜온 장소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있는데, 이 교회도 그랬습니다.
아침에 프라하역 플랫폼에서 받았던 울림이 이곳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느낌이었어요.
높은 첨탑과 차분한 벽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도시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놀랍게도 외관은 프라하의 비투스 성당과 닮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그는 프라하의 주요 건축물인 카를교, 올드타운 브리지 타워, 골든 게이트, 틴 성당 앞 성모 교회 등을 건축한 페트르 파를레르시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프라하의 브루넬레스키(피렌체의 건축가)라고 할만한 사람이죠.
플랫폼에서 만난 윈턴, 골목의 슈톨퍼슈타인, 페트르 파를레르시의 건축까지. 콜린에서 만난 하루는 단순한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삶이 겹쳐진 하루,
색깔은 없지만 메시지가 분명한 흑백 사진처럼 기억되는 하루, 그 또한 길을 떠났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