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될 생각도 능력도 없으면서 남발한 것에 대한 고해
'아빠들 주목', '아빠들이 기다린다는 그 차', '아빠들 원픽'
클리셰(cliché)인 줄 알지만 종종 쓰곤 했던 제목들입니다. 클리셰는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댓글에는 '아빠 좀 그만 갖다 붙이라'는 원성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조회수는 보장하니까 어쩔 수 없었죠.
사실 클리셰가 무작정 나쁜 건 아닙니다. 그만큼 보편적인 정서에 기반한 표현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거기에 기대는 것은 적어도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취하면 안 되는 안이한 자세입니다. '조회수는 나오니까'라는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고 변명이죠. 게으르게 만든 컨텐츠를,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빠들에게 들이미는 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클리셰의 좋지 않은 면이 확실히 있네요. 클리셰에 익숙해지면 보이지 않지만 봐야 할 것을 찾아내는 체력이 무뎌집니다.
특히 제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제가 감히 아빠가 될 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는데 어느 아빠의 삶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습니다. 금전적으로 여유롭다고 해도 아이의 아빠가 되는 모습을 별로 상상해본 적이 없고, 자녀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친구들의 모습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대로 멋지다고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그 전에 배우자를 맞이한다는 것은 책임과 희생이 따른다는 말도 클리셰군요. 아버지가 되려면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설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조정자로서의 능력. 조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국면에서 전체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조정을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야 그 경험에 빗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협상이 가능하니까요. 그걸 잘 하고 못 하고는 둘째의 문제고 일단 아버지가 됐다는 것은 조정과 협상의 역량을 갖추긴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미혼, 독신자에 비해서는요.
그렇다면 '아빠의 차'는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아빠의 세계는 복잡하고도 넓습니다. 기아 카니발, 혼다 오딧세이 말고도, 타협의 결과가 되는 차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아빠가 조정해야 하는 대상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서도 그 조정의 결과값은 달라지겠죠.
사실 아빠의 차라는 개념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시장 조사를 하면서 예상 타깃군을 만들어낼 때 쓴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 방식도 낡은 것이죠. 과거의 생애주기형 분석 결과입니다. 요즘 자동차 제조사의 선행 시장 조사(차량 개발 전 단계에서 하는 조사)를 보면 매우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예상 타깃군의 형태를 추론해내고 예상 고객의 이미지를 만들죠. 그런 점에서 지난 해 국내 출시됐던 토요타의 하이랜더 캠페인이 대표적인 변화였습니다. 전형적인 패밀리카 사이즈이지만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꽃미남이 강아지와 있는 모습을 내세웠죠. 가족 구성원의 수와 차의 크기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시대라는 걸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게다기 유례없는 인구 감소가 예정돼 있는 지금, 한 차의 세대를 5년으로 볼 때, 당장 두 세대 뒤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급격히 쪼그라들게 됩니다. 자동차 제조업은 전후방이 두텁습니다. 그만큼 딸린 기업들이 많은데 그 기업들도 내수에 목을 맸다가는 줄도산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지역의 작은 부품 공장 영업팀들도 수출 판로 찾기에 목을 매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국내에 진출해 있는 주요 수입차 브랜드들도 발을 빼는 경우가 많아지거나 라인업을 대폭 축소하겠죠.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의 영향으로 페라리, 벤틀리, 포르쉐,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아니면 3,000만 원대 초반 차량만 팔리는 희한한 시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해외 기업들이 보기에 가치가 없는 시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죠. 주가는 나락으로 가고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갈 수도 있겠죠.
물론 요즘 출생을 애국으로 말하는 것이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현재와 같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직접적으로 국력의 약화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해외에 나가면 한국인들이 받는 대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선망이 높고, 유럽 웬만한 도시에 가면 한국어를 하는 직원들이 호텔 곳곳에 채용돼 있습니다. 2018년, 2019년만 해도 파리 출장을 갔을 때, 영어도 잘 안 통한다는 나라에서 한국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 그 위상이 박살날 수도 있는 거예요. 나라의 위상이 정말로 박살나는 상황이라면, 개인의 행복으로서의 출산이 사회 문제 해결로서의 출산보다 중요하다는 개념도 결국 사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나쁜 상황에, 능력이 부족해서든 의지가 부족해서든 일조한 사람으로서, '아빠'라는 키워드를 함부로 쓰는 것이 더 죄스럽군요.
그런 상황이 되면 '아빠의 차'라는 말은 클리셰가 아니라 아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