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팜팜 Mar 08. 2021

[약사의직업 여행기]

03. 낮은 곳으로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라는 시를 좋아한다.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중략)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시였고

평생을 함께할 나의 인연이 생기면 이 시를 적어주어야지 마음먹기도 했었다. 

사랑의 시라고만 생각했던 이 시를 다시 보니

봉사하는 업을 가진 모든 이에게 필요한 자세를 말해주는 것도 같다.

마음을 낮은 곳에 두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이 봉사의 일일 것이다. 

무보수가 아니니 봉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으나

대민업무를 하는 약국 약사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생업이 정말 괴로워지는 것 같다.


약국의 업무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처방전 검토: 용량 오류가 있는지, 환자에게 금기인 약이 처방되지는 않았는지 확인 후 필요시 병원에 연락하여 처방 수정을 받는다.

2. 조제: 처방에 맞게 조제하되 제형 등 약물의 특성 고려하여 포장을 달리하여 불출한다

      (이때 자동포장기계의 약포지를 갈거나 하면서 몇 번 사고를 치다 보면 기계 고치는 달인이 된다)

3. 검수: 처방과 다르게 조제된 것은 없는지, 약이 누락된 포지는 없는지, 개수는 맞는지 확인한다. 

3. 복약지도: 환자 눈높이에 맞게 복용방법, 복용 시 주의사항 등을 안내한다. 

4. 일반의약품 및 건강기능식품 상담: 질의응답 반복을 통해 환자에게 필요한 일반의약품 및 건강기능식품을 상담한다. 

5. 마약류 의약품 관리: 마약,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 등) 의약품의 관리를 위한 시스템 입력

6. 재고관리: 사용된 의약품의 수량 파악, 근처 병원 처방 트렌드 반영하여 재고를 관리한다.

7. 기타: 국장님들의 경우 도매상, 제약회사 대금 결제, 세무, 노무 및 회계 등 전반에 걸친 관리를 한다. 


글로 정리해보면 굉장히 반복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업무이지만, 실제 근무를 하다 보면 어떻게 한건 한건 이렇게 다 다를 수 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커뮤니케이션의 방식도 천차만별이며 내가 A라고 말한 것을 누군가는 a, A* 혹은 Z로 알아들을 수 있음을 알았다. 세상에는 화가 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정말 많다는 걸 느꼈다. 


똑같이 감기약을 사러 온 손님인데 대화의 흐름에 따라 결국 드리는 약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람 봐가면서 판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오해는 말길-

감기도 증상이 어떤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가령 콧물이나 가래가 맑은지 끈끈한지, 색깔이 누런지, 녹색인지 등) 기존에 드시고 계시던 약이 있었는지, 혹시 못 드시는 약은 있는지 등을 파악해야 그에 맞게 최적의 약을 조합해서 드릴 수 있다. 

2-3분이면 끝날 대화이지만 감기약 사는데 뭐 이리 말이 많냐는 짜증을 내시는 분이라면 원하시는 대로 종합감기약 한통 드리고 끝날수밖에..  


앞선 글에서처럼 안녕하세요-라는 단순한 인사에 

안녕하게 생겼냐!!!라고 화로 받아치는 사람을 한 명 정도 맞이했을 때는 당황, 머쓱으로 끝날 수 있지만

그와 비슷한 류의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나 역시도 화가 나고 역시 성악설이 옳았다며 인간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도 했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못뱉는다고 했지요? 웃는 얼굴에 침 잘만 뱉던데요.

의사는 어렵고 약사는 만만해서 화내는 건가?

내가 이러려고 하기 싫은 공부 해서 버텼나?

내일은 또 누가 진상을 부리려나... 또 감정 쓰레기통처럼 그걸 받아내야 하나... 

이런 생각들에 잠못이루기도하고 출근이 무서웠었다. 

결국 그런 감정적인 문제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약국을 그만두었던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내 마음의 준비가 부족해서였지 않았나 싶다. 또 체력소모가 생각보다 커서 체력 부족으로 인한 내 인내심도 바닥났던 시기였다.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에 사람 간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은 부족했고, 상대방이 쏟아내는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마음 가득 담아두고 부글부글 속 끓이던 나날들.

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이라는 알량한 자존심과 오만함이 나를 더 견디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몇 년이 지나고 다른 일들을 해보면서 과거의 나를 객관화할 수 있었고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음을 낮은 곳에 두지 못해 괴로웠던 지난날이었다.

마음을 낮은 곳에 두는 것은 정말 어렵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약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게 두고 환자의 괴로움에 대한 측은지심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나중에 언젠가 약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마음을 낮은 곳에 두고 섬기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약사의 직업 여행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