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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맡이야기꾼 Nov 12. 2019

우리에게 부족한 감수성, 공감수성(共感受性)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 요인

차갑고 두꺼운 한 장의 유리에 우리의 감수성이 어떻게 단절됐나 생각해볼 일이다.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에 살던 벨루가 '벨리'가 지난 10월 말 세상을 떠났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작은 수조에 가둬놓은 벨리가 제 수명도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폐사하자 안 좋은 여론을 의식한 롯데월드 측은 부랴부랴 남은 한 마리의 벨루가 '벨라'를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불과 3년 전 같은 수족관의 벨루가 '벨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롯데월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비난 여론과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달리 매섭게 느껴졌나 보다.


극장에선 <82년생 김지영>이 뜨겁다. 그 뜨거움이 온라인 전장으로 옮겨와 페미니즘과 반(反) 페미니즘으로 나뉘어 격전을 벌이고 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포털의 영화 평점에는 별 1개의 테러와 별 10개의 응원이 경쟁하듯 올라오면서 그 전장이 달궈졌고, 모 여자 아나운서가 이 영화의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SNS에 올리면서 엄청난 비난과 응원을 통해 또 한 번 전장이 치열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치열한 페미니즘대 반페미니즘의 대결 양상을 보니 페미니즘이 공론화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지금은 이런 논란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대적 약자인 여자와 동물(동물을 옹호하는 단체), 두 존재가 내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고작 몇 세대가 바뀌는 동안 전 세계가 인정할 만큼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세계 13위 규모의 경제력에 걸맞은 문화를 갖기 위해 치열한 문화 성장통을 겪고 있다. 예전보다 더 복잡해진 사회는 세대갈등, 젠더갈등, 주거 갈등과 같은 도저히 합의가 어려워 보이는 여러 갈등을 낳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심화되면서 과연 봉합이 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점차 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거친 갈등이 역으로 상대적 약자들을 조명한다는 데에서 오히려 이러한 논란과 비난이 반갑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성숙한 문화를 갖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존재할 수 있지만,  대화와 타협을 위해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감수성'이 아닐까? 감수성이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 상대 성의 입장에서 배제와 차별의 요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인 젠더 감수성/성인지 감수성,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인 생명 인지 감수성처럼 나와는 다른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누구나 살아온 환경에 따라 나만의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하나의 생각과 시선으로 통일하는 것보다는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더 쉽고 중요한 게 아닐까?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떤 감수성을 갖고 살았나? 나와는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나?


<82년생 김지영> 관련 포스팅에 적힌 댓글이나 글을 보면, 나도 82년생인데 저런 상황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남자들이 꽤 있다. 옆에서 지켜봤는데 저런 일은 정말 극소수에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자신이 남자로서 겪은 차별을 이야기하며 남자가 더 차별받고 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징징대는 거라고 그 목소리를 뭉개버린다. 소위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커뮤니티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개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뭐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자들의 사회생활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중에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다는 말인데, 누구나 볼 수 있고 느껴지는 그런 진입장벽이면 사람들이 그 허들을 유리 천장이라고 불렀을까? 왜 남자에게는 유리천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건지,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일로 만들 수 있는 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물보호단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동물보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며 신뢰할 수 없는 입진 보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 치고 동물권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왜 동물권을 주장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감이 빠진 시선으로 동물을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벨루가의 죽음이 왜 일어났는지, 동물을 학대하는 일이 공장식 축산이 왜 인간에게 해로운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나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는 이해하기 힘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존재와는 토론과 타협이 불가능하고 갈등만이 지속되는 관계가 된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으로나 자신에게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마치 나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없어져야 나에게 복이 온다는 기복신앙을 외치는 종교인처럼.


그래서 우리가 성장통을 끝내고 더 성숙한 문화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위에 이야기한 성인지 감수성, 생명 인지 감수성과 같은 여러 감수성들을 포함한 '공감 감수성, 공감수성(共感受性)'이 아닐까. 어떤 외부의 자극도 이해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바로 공감수성이다. 그런 감수성을 바탕으로 비록 조금 늦었지만 공론화의 장으로 여러 문제를 끌고 나왔으니 이제 상대방을 이해하고 토론해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은 거라고 희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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