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미안해요 리키
공정(公正). 2019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단어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이 단어가 떠오른다. 사전적 의미로는 공평하고 올바른 것을 의미하는 '공정'이 중요한 가치로 우리 사회 전면에 등장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은 기회의 공정이 아닌 결과에 대한 공정이다. 즉, 각자 노력한 만큼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공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 있었던 대입 정시 확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수시보다 기계가 객관식의 답을 채점하는 정시가 더 믿음이 가고 공정하다는 여론이 63%로 더 높았다. 몇몇 소수의 학생들이 대학 논문의 저자로 이름을 올리거나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활동을 하며 스펙을 쌓고 수시전형에서 유리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험생이라면 모두 똑같이 OMR 카드의 오지선다로 평가받는 것이 더 공정하다는 여론이 전년 대비 10%나 많아졌다. 물론 여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정시보다 수시가 부모의 소득 격차와 관계없이 더 다양한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고 기회를 얻은 것이 사실로 밝혀졌지만 그 사실과는 관계없이 우리는 기회의 공정보다는 결과의 공정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경쟁의 게임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소득 격차로 인해 이미 시작부터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그렇게 경쟁에서 도태된 개인을 게으르고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그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필요악이라고 규정하는 엘리트주의를 '부정의(unjustice)의 교의'라고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저자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엘리트들이 말하는 그 필요악은 타인을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환경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한다. 즉, 정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이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이야기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물리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핸디캡을 가지고 불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의 새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이런 불공정한 사회가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만큼 보수적인 사회인 영국 사회의 택배 기사인 리키 가족의 모습에서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빚과 시간에 허우적 대며 일과 가정 모두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가장 리키를 보며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나 또한 언제든 리키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미래의 불안과 현실의 불평등함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으로 돈을 벌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저소득층은 시간으로 고소득층의 돈을 산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리키와 애비의 직업이 택배 기사와 요양인으로 설정된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시간으로 돈을 버는 저소득층은 계속 시간의 틈을 벌려가는 상위 1%의 속도를 영원히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상위 1%에 들지 못한 우리는 점점 더 도태될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 꽉 막혀 나의 노력과 관계없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모습은 세기말적인 풍경 같다. 다들 알다시피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멸절 수순으로 보이는 0점대 출산율이나 OECD 1위의 노인 자살률, 그리고 극악무도한 흉악범죄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우만이 말했듯이 낙수효과란 것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이제 우리는 모두 로또를 사고, 몇 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을 기웃거리며 얼마 남지 않는 하위권 탈출의 희망을 안고 산다. 그렇게 우리는 행동으로 체감한다. 자본주의 시대가 종말을 알리기 전까지 이미 벌어진 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며 당장 다 함께 잘 살자는 말은 모두가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걸. 지금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칠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많다. 이제는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결과보다는 기회를 공정하게 나눠 갖는 방향으로 말이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지만 그렇게 주어진 환경에서도 누구나 충분히 여러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한다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막연하고 이상주의적인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