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봤자 회사로 돌아갈 몸
지난주 금요일, 편도 수술을 하고 2박 3일간의 입원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처방해 준 마약성 진통제도 말을 듣지 않아 내내 고통에 몸부림치기만 하다가 멋대로 처방을 한 번에 한 알에서 두 알로 늘리고 나서야 일상생활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이라 약이 효과가 없다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선은 내일 오전에 진료 예약을 잡아놨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내 멋대로 처방에 의존하기로 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하루 12알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증량했더니 효과가 빵빵하다! 만족스럽다.)
증상이 좀 나아지니 책상 한켠에 쓱 밀어뒀던 일들이 떠올랐다. 우선 너저분한 집 청소와 빨래부터 해치우고는 메세지함을 열어 밀린 문자들을 보냈다. 외주 일을 하던 담당자와 돈이 필요하다던 외국인 친구, 그리고 입사 지원 제안을 했던 헤드헌터였다.
외주 담당자에게는 원고가 늦어 죄송하다고 그간 이런 일이 있었다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더니 일정은 괜찮으니 몸조리부터 잘하라고 했다. 그리고 추가적인 일에 대해서도 진행 여부를 물어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답변을 주기로 했다.
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친구가 변호사 선임과 항소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며 혹시 돈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된다면 얼마나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 나도 백수인 탓에 빌려줄 여유 자금 같은 건 없었고 대신 내 이름으로 은행에서 소액 대출을 받아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금액이라도 괜찮다며 부탁한다고 했다. 동정은 마음이 아니라 돈으로 한다고 했는데 내가 대출까지 받아 마음을 쓰는 게 맞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만큼 그 친구가 비자 문제 때문에 우리나라를 떠나길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부디 작은 돈을 발판 삼아 이겨주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입사 지원 제안을 줬던 헤드헌터에게 답변이 늦어 죄송하다며 아직 지원 기간이 남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목요일까지 지원은 가능하나 내일까지는 이력서를 전달해주었으면 한단다. 아무래도 나 홀로 지원이 아니니 헤드헌터 쪽에서 이력서를 보고 기업에 맞게 수정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거다. 취합해서 정리도 해야 할 거고. 아무튼 적극적인 입사 의지가 없던 내게 오래간만에 달콤한 제안이라 이력서를 다시 쓰는 수고로움까지 강행하기로 했다. 아마 지금 쓰는 이력서가 2015년에 썼던 버전 이후의 새로운 버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력서에 경력 기술까지 주욱 해놓고 나니 난 정말 회사에서 1년을 버티기 힘든 사람이었다는 게 눈에 보인다. 어떤 때는 자의로, 어떤 때는 타의로 회사에서 나와야 했고 그 히스토리는 하나의 이력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니 채용 담당자들이 내게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근속 기간이 대체로 짧으시네요?" 일 수밖에. 지난 글에 아주 담담한 척 난 이랬고 저랬어! 모두 이유가 있었다고! 하며 광광 날뛰었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건 팩트다.
이건 당당했던 지난 글 : https://brunch.co.kr/@playsummer/24
이력서를 쓰고 있자니 약간 현타가 와서 또 헐레벌떡 글을 쓰러 왔다. 어차피 다시 회사로 돌아갈 몸인데 뭐하러 그렇게 발버둥을 쳤을까? 이력서를 새로 쓸 때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어제 새벽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워킹 홀리데이를 가면 어떨까? 영어 실력도 늘리고 돈도 좀 벌어와서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고 싶은데 너무 늦었나? 돌아오면 지금보다 더 갈 데가 없으려나?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아무래더라도 아마 이번에 쓰는 지원서가 잘 된다면 그 회사에서 오래 눌러앉고 싶다. 사실 이전 회사도 그러려고 마음먹고 까다롭게 따져 들어간 곳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쪽에서 내가 안 맞는다 했다. 그래서 상실감이 컸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상실감은 뒤로하고 나는 또 이력서를 쓴다. 이번 이력서가 완성되면 채용 사이트 곳곳에도 이력서를 한 번 업데이트할 심산이다. 아 오랜만에 업데이트하려니 이력서 사진부터 자소서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다 걸리적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달라도 달라진 것 같다. 새로운 모습의 새로운 나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경제적 자립이 될 때까지는 결국 회사에 붙잡힐 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