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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25. 2018

#33 <침묵>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침묵이 은폐하는 것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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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산(최민식)은 유달리 말이 없다. 조용히 걸어와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임태산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종종 말없이 멈춰 선 그의 모습을 바라본다. 많은 장면에서 그는 멈춰서있고, 긴 침묵 뒤에야 겨우 대화를 이어간다. 그렇지만 그가 침묵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갑작스러운 약혼자(이하늬)의 죽음과 살인 피의자로 몰린 딸(이수경)을 둔 재벌 회장 임태산은 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강력히 외친다. 그의 외침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검찰총장 내가 사드릴게요", "원하는 액수를 불러봐요. 돈이 진심입니다." 최근의 한국 영화에서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돈과 권력의 언어는 재벌 회장 임태산에게도 지겹게 반복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그의 언어가 실패한다는 것이다. 임태산의 말을 들은 검사와 증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검사를 뭘로 보고". 영화 '침묵'은 임태산의 침묵을 지켜보다가 임태산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의 '돈'과 '권력'이 무시받는 것을 본다. 따라서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인 동시에 그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무력함이다. 어쩌면 '침묵'은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힘'과' 권력'의 언어를 멈추게 하는, 지긋지긋한 반복의 무력감을 직시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생각은 영화의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래의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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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인 딸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법정 드라마로 전개되던 영화는 30여분을 남기고 불현듯 이야기 전개의 방향을 바꾼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약혼자의 살인이 사실은 임태산이 벌인 범죄임을 밝히더니, 돌연 플래쉬백으로 그것이 딸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임태산의 전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겨지는 것은 딸 대신 살인죄로 감옥에 수감된 임태산의 부성애와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딸의 죄책감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당혹스러운 것은 반전 자체가 아닌 반전이 만들어낸 역설이다.


감옥에 갇힌 임태산은 패배한 것일까. 임태산이 감옥에 갇히면서 세상은 더 이상 그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철저히 그의 능력으로 통제된 세상일 뿐이다. 그가 딸 대신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히 세상을 통제하여 그들을 속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통하지 않은 듯 보였던 ‘돈’과 ‘권력’의 언어가 기능했고, 침묵에 은폐되었던 시간은 임태산의 언어가 지배하고 있었다. 20분 간의 플래쉬백으로 보인 장면은 그동안 우리가 확인한 cctv의 화면이 임태산의 능력을 통해 철저히 통제된 또 하나의 세상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만든 세상은 진실이 되었다.



그의 ‘돈’과 ‘권력’은 정확히 세상을 통제하였고, 영화는 여전히 그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 머물러 있다. 그 속에서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영원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영화 '침묵' 속의 침묵은 진실이 철저히 은폐된 세상이며, 그것은 더 악랄한 진실이다. 죽은 임태산의 약혼녀가 환영으로 나타나 그에게 '괜찮아'라고 위로할 때, 이 역시 한 남자의 완전한 통제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잔인한 진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 진실을 고발하는 것일까. 아님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 채 타성에 젖어 그 관성을 반복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의 '침묵'에서 단 한순간도 그 ‘진실’을 의심하는 순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한 발짝 물러선 영화 ‘4등’을 만든 감독 ‘정지우’의 작품이라는 점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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