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것들을 응시하는 영화적 방식.
"봄이 왔네요. 커디 양"
영화가 시작되고 11분이 지난 시점. 마차를 탄 목사는 커디(힐러리 스웽크)에게 인사말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바느질을 하고 있고 커디의 뒤로 마구간의 문을 비치는 4:3 프레임의 세상 속에도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봄이 찾아온 것이다. 이보다 앞서 삽입된 미친 여자들의 장면 속에서 보였던 차가운 눈은 지금의 봄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런데 정말로 봄이 온 것일까. 여자들을 데리고 동부로 갈 사람을 뽑는 장면에서 우리는 정확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이웃은 오늘이 5월 5일이니 독립기념일인 7월 4일까지 도착할 수 있겠냐며 묻는다. 대략 5주가 걸릴 거라 예상했던 그들의 여정은 아마도 5월과 6월을 경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정이 시작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이다. 겨우 담요 두 장만 줬냐는 조지(토미 리 존스)의 불평에서 밤새 그들이 겪어야 했을 추위를 가늠할 수 있다. 5월에 불어닥치는 눈보라라니.
나는 네브래스카에서 아이오와로 향하는 미국의 날씨를 알지 못한다. 5월의 눈보라가 실제로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험난한 그들의 여정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들의 여정의 마지막에 있다. 여정의 끝에 도착한 동부의 마을에서 카터 부인(메릴 스트립)은 위로하듯 말한다. "겨울이 무척 힘드셨겠군요." 동부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에 눈이 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5월과 6월을 겨울이라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서부는 명백히 북반구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굳이 여정의 기간을 명확히 설정한 영화에서 봄과 겨울의 명백한 혼란은 단순한 실수가 아닐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커디의 여정을 맞이하는 것은 매서운 눈보라와 찬 바람이다. 이 계절은 그들의 여정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설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차가운 눈보라는 커디의 여정에만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차가운 눈보라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영화의 초반부에 갑작스럽게 삽입되어 있는 미친 여자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이다. 거기에는 그녀들이 겪었던 죽음이 있다. 황량한 벌판에 쓰러진 가축을 부둥켜안고 우는 여자. 폭설이 내리는 야외로 죽은 엄마를 내놓으려는 남편을 향해 분노하는 여자. 눈이 쌓여있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 아무런 표정 없이 죽은 아이를 버리고 오는 여자. 각기 다른 표정과 미세하게 다른 계절의 온도를 통과하며 폭력적으로 삽입된 세 번의 인서트에는 모두 죽음의 순간이 담겨있다. 마을의 봄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 여자들의 겨울은 언제나 죽음이 함께한다.
죽음은 동부로 향하는 커디의 행로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들의 경로에는 죽은 인디언이 동물의 가죽에 말려 있고, 11살 어린아이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다. 도처에 흩어진 죽음. 하지만 그것을 죽음으로 인식하며 슬퍼하는 것은 오직 커디뿐이다. 조지가 인디언의 시체를 감고 있는 동물의 가죽을 챙기자 커디는 그를 향해 어떻게 죽은 이에게 그럴 수 있냐며 따져 묻지만, 조지에게 그것은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생존수단일 뿐이다. 또한 커디가 파헤쳐진 아이의 무덤을 다시 수습해주고 가겠다고 하자 조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삽만을 던져주고 떠나버린다. 조지에게 인디언과 어린아이의 죽음은 그저 서부의 풍경이다. 이것은 오직 커디에게만 죽음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에서 가장 갑작스럽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커디의 자살은 그 연장선일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커디의 갑작스러운 자살의 이유를 해명하고 싶어 하지만 이 일은 쉬어 보이지 않는다. 커디는 행동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가 미친 여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행로에 자원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목사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마을의 여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우려를 얘기하자, 한참 시선을 피하던 커디는 자기가 주문한 멜로디언을 얘기하며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답한다. 그녀는 어딘지 마을의 여자들에 관한 얘기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뒤이어 여자들을 데리고 동부로 갈 사람을 뽑는 자리에서 그녀는 자원하듯 주민들 앞에 당당히 나선다. 그리고는 다음 장면에서 교회 밖으로 나온 커디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볼 때 그녀의 표정에선 두려움이 느껴진다. 주민들 앞에서 계획과 준비를 말하는 그녀는 당당함과, 갑작스러운 선택을 하는 충동성은 서로 잘 겹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자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살의 원인으로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한 여자의 자괴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밥이 커디의 집을 찾는 첫 장면에 이미 밥에게 무시당하는 커디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커디의 자살을 만들어낸 차이를 커디의 자괴감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홈즈맨을 동선의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커디의 자살은 동선의 이동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거운 마차에 미친 여자들을 실은 채 동부로 향하는 커디의 이동이다. 커디의 죽음은 그 과정에 있으며, 그 결과로 그녀의 여정은 중지된다. 그녀는 이제 동부로 가지 못하고 인디언이나 어린아이처럼 황량한 벌판에 묻힐 수밖에 없다. 서부의 개척지에서도 동부의 도시에서도 살 수 없는 커디. 죽음에 앞서 그녀가 명확히 달라지는 순간은 파헤쳐진 무덤을 수습해주는 장면에서 부터이다. 그녀가 말에 오르려 하자, 말은 떠날 수 없다는 듯 수 차례 제자리를 빙빙 돈다. 힘겹게 떠난 듯했으나 얼마간의 쇼트가 이어진 뒤 그녀는 황량한 무덤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한 불빛을 따라 눈보라를 헤쳐 무리와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서둘러 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녀가 모닥불이나 음식이 아닌 마차를 향해 달라가는 것은 어딘지 이상해 보인다. 동부로 떠나기 전 마차를 받으러 간 곳에서 그녀는 동부로 떠나는 두려움을 고백한다. 마차는 그녀가 가장 나약해질 수 있는 혹은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다. 동시에 마차는 미친 여자들의 공간이다. 그것은 미친 여자들을 싣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녀들의 손은 마차의 고리에 묶인다. 눈보라를 헤매다 겨우 도착한 커디는 마차에 올라타며 스스로 미쳤음을 인정하고 있다.
커디의 자살이 특이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방식에 있다. 커디는 목을 메서 죽었다. 그녀의 자살 방식은 특별하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그녀가 목을 메 죽을뻔한 조지를 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것을 특별하게 한다. 조지가 죽을뻔한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조지는 동부로 떠난 밥의 집을 몰래 차지하고 있다. 그를 내쫓기 위해 마을의 남성들이 들이닥친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총을 들고 등장하는 일련의 남자들이 밥의 집을 둘러쌓을 때, 그들이 만들어내는 자경단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모습이다.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전형적인 서부극의 서사와 무관한 이 영화에서 오직 이 순간에만 자경단이 등장한다. 그리고 자경단은 조지, 즉 악당의 목을 매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그리고 이때 개입하는 것이 커디다. 우연히 지나치던 커디는 조지의 죽음을 막는다. 서부극의 이미지로 등장한 남자, 조지는 커디로 인해 서부극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커디는 서부극의 이후에서 서부극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서부극 이후에 시작된 여정. 동부의 도시와 개척지, 그 어떠한 공동체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는 커디. 커디의 죽음은 단순히 극 중 한 인물의 죽음의 아닌 서부극 이후의 공동체가 잃어버린 상실의 흔적이다.
조지는 커디의 죽음 이후에 이 여정에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미친 여자들은 그를 따라 물에 뛰어든다. 이내 뒤돌아 선 조지는 물에 뛰어들어 세 여자를 부축해 물에서 빠져나온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조지와 세 여자의 모습 뒤로 따뜻한 음악이 흐른다. 물에서 세 명의 여자들을 구해 이끌고 탈출한 조지는 뒤이어 그녀들에게 작은 음식 조각을 나눠준다. 조지는 그녀들을 돌볼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 장면들은 매우 감동적으로 찍혔다. 그래서 이질적이다. 커디의 죽음 직후에 감동적인 연대라니. 이어지는 마차 내에서 세 여자의 시선은 이전의 미친 여자들과는 따뜻함과 애정이 묻어있다. 그들의 여정의 시작인 커디의 결심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의지가 느껴졌고, 그들의 여정은 숭고하기보단 처절하다. 때문에 영화에서 이토록 직접적인 감동은 생소한 감정이다. 영화에서 감동의 연대는 커디의 죽음 이후에 가능하다. 어쩌면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잔혹한 지점일 것이다. 이 감동은 커디가 만들어낸 것이다. 동시에 커디의 죽음 이후의 것이다. 남자는 달라졌다. 세상은 평온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 가능하다.
그런데 이 풍경은 어딘지 여정의 도착지인 동부 마을의 분위기와도 닮아 있다. 차갑고 힘겨운 겨울을 통과하여 동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동부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다. 두 공간 사이를 가르는 계절의 격차는 단순히 도시의 따뜻함이라 치부하기에 당혹스럽다. 힘겹게 도착한 마을에서 조지는 지나가는 여인들에게 길을 묻지만, 그녀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 조차 꺼린다. 마침내 목적지인 카터 부인의 집을 찾았을 때 전하는 환대의 말과는 달리, 여성이 온다고 들었다는 그녀의 말에는 조지를 향한 의심이 깃들어 있다. 동부의 공동체에서 역시 그는 이방인일 뿐이다. 여자들을 카터 부인에게 부탁하고 돌아온 뒤 그는 커디가 준 수표를 챙겨 도박판을 찾는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낯선 이를 향한 경계가 가득하다. 뒤이어 은행이 파산하여 커디의 수표로는 도박에 참여할 수 없다며 내 쫓긴다. 동부의 따뜻한 햇살은 그들의 여정에서 겪었던 매서운 눈보라보다도 거칠게 조지를 내쫓는다.
다시금 서부로 향하는 조지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사라져 가는 그의 그림자와 찬 공기를 가르는 총소리는 위협적이지 못해 쓸쓸하다. 돈을 챙기지 못한 그의 여정은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떠나기 전 조지는 맨발로 일하는 어린 소녀에게 신발은 내밀려, 커디의 이야기를 전한다. 조지의 말처럼 커디는 정말로 대단한 일은 한 것일까. 그는 커디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만들어 다시 서부로 향한다. 하지만 주인을 알 수 없이 버려진 묘비는 작은 발길질에 물에 잠겨버린다. 커디의 노고는 도시의 노동자 소녀에게 주어진 작은 신발만큼 남아 있게 되었다. 커디는 대단한 일을 했으나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소리 없이 사라진 그녀의 흔적뿐이다. 여기 봄이 왔는가. 그 질문은 조금씩 변형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할 것이다. 서부에 봄이 왔는가. 미국에 봄이 왔는가. 그녀에게 봄이 왔는가. 서부에 커디가 묻혀 있는 동안 그녀는 그렇게 잊혀져 있다. 그녀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묘비도 없이 묻혀 있는 동안 그곳에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죽음이 잊혀져 있는 한 겨울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죽에 둘려진 채 죽어간 인디언과 동물에 의해 파헤쳐져 묘비가 더럽혀진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부라는 공간 속에서 허망하게 묻힌 여인과 인디언 그리고 어린아이가 흔적도 없이 묻혀 있는 동안 아직 그곳에 봄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