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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Nov 22. 2017

#31 <빛나는> 희미해지는 빛. 빛이라는 영화.

빛을 본다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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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남자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가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손으로 주변을 더듬던 그는 이내 자리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가벼운 안내 방송과 함께 스크린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마도 그의 귀를 통해 상영되는 영화는 음성 해설자가 해설을 덧붙인, 노년의 이별과 죽음을 다룬 한 노감독의 영화 '히카리' 일 것이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아내를 잃은 노인은 쓰러질 듯 모래언덕을 넘어 하늘을 응시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남자의 표정만이 화면에 가득 남겨진다.


미사코(미사키 아야메)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을 붙이는 음성 해설자이다. 그녀는 노인이 쓰러질 듯 하늘을 응시하는 장면에 붙일 적절한 해설을 찾지 못한다. 상세한 미사코의 설명에 나카모리는 상상력은 제한한다고 불평하고, 설명을 최소한으로 한 말에는 설명을 피하려 했다고 비난한다. 아직은 서툰 그녀의 해설을 향한 나카모리의 충고는 이미지로서의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음성해설을 검토하는 영화의 장면에서 노감독의 영화와 시각장애인들의 표정 그리고 해설을 덧붙이는 미사코의 음성이 번갈아가며 오간다. 이 순간 중요해지는 것은 노감독의 영화 자체보다 음성해설을 통해 그려지는 또 다른 이미지이다. 이후 미사코의 음성해설이 시각장애인들의 조언에 따라 수정을 거치며 반복될 때 우리는 하나의 영상을 앞에 두고 변화하는 음성해설을 확인한다. 결국 이미지로서의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나카모리와 미사의 이야기를 경유하여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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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질문에 도달하기 위해선 반복되는 '빛'이라는 테마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두 개의 영화가 있다. 미사코가 해설을 덧붙인 노감독의 영화 '히카리'.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미사코와 나카모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빛나는'. 동일한 제목을 한 두 영화가 공유하는 공통점은 '빛'이다. 미사코가 해설을 덧붙인 전자의 영화가 석양의 저무는 빛을 바라보며 끝나는 영화라면, 미사코와 나카모리의 이야기는 석양의 빛을 잃어가는 이의 영화일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미사코에 던져진 과제는 석양을 응시하는 노감독 속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동시에 빛은 시력을 점차 잃어가는 나카모리에게는 상실의 대상이기도 하다. 유명 사진작가였던 나카모리에게 빛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는 것과 동시에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겨우 형체만을 느낄 수 있는 시력으로도 힘겹게 필름을 바꿔 끼며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은 빛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사코에게도 빛은 아버지에 대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로 인해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코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겠다며 사라진 어머니를 석양이 내리쬐는 바닷가의 언덕에서 찾는다. 언덕 위에서 보이는 바닷가의 석양은 사라진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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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코가 나카모리를 향해 가졌던 초반의 적대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느낀 것은 나카모리가 찍은 석양의 사진을 통해 발견한 둘 사이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나카모리의 사진첩을 넘기던 미사코는 바닷가의 석양을 찍은 사진에서 시선을 멈춘다. 그것은 나카모리의 작품인 동시에 미사코의 아버지이다. 영화의 포스터로 사용되기도 한 미사코와 나카모리의 다소 갑작스러운 키스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시력의 상실을 앞둔 나카모리는 미사코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석양이 비추는 해변을 찾는다. 이때 나카모리의 감각 속에는 아직은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곧 사라져 버릴 눈 앞의 빛이 어른거리고, 미사코에게는 곁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아버지의 기억이 번진다. 완전히 사라지지도, 그렇다고 남아있지도 않은 그들이 가진 감각은 서로가 바라보는 빛을 통해 각자에게 새겨진다. 조금은 당혹스러운 그들의 키스는 서로를 향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각자가 느꼈던 감정에 대한 호응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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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석양의 빛을 바라보며 상실을 응시하는 것은 미사코가 해설한 영화 속 엔딩의 노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막 아내의 죽음을 확인했지만 차마 그녀를 잊을 수 없는 노인은 쓰러질 듯한 몸으로 붙잡고 언덕을 오른다. 그런 그에게 빛이 내리쬐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고요히 그 빛을 응시한다.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까라는 영화의 질문은 때문에 동시에 미사코와 나카모리가 겪었던 상실의 경험과 공명한다. 노감독은 인터뷰에서 노인이 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다고 말했다. 때문에 영화 속 노인은 죽은 아내를 빈자리와 여전히 남아있는 아내에 대한 기억 사이에서, 그저 쏟아지는 하지만 이내 사라져 버릴 석양의 빛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지 못한 미사코나 겨우 희미하게 남아있는 시력조차 곧 잃게 될 나카모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빛을 본다'는 짧은 해설은 상실의 감각에 대해 그저 그 행동을 말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설명도 붙일 수 없는 그녀의 유일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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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노감독의 영화가 끝나고 카메라는 영화를 본 관객의 모습을 찬찬히 비춰준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화면 속에서 거울처럼 비친 우리의 위치를 인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 결국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빛을 본다는 행위이다. 그 이후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것이며, 영화의 감상은 관객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영화를 보는 이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보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에게는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든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적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은 그녀의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녀의 가장 교과서적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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