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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Nov 13. 2017

#30 비존재를 바라보는 불가능한 시선

“퍼스널 쇼퍼”와 “사랑의 시대” 속 시선이 만드는 근심과 불안에 대해서

시선은 영화 매체를 특정 짓는 매력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의 사건을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위치와 거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시지각적 능력은 인간의 시지각적 능력을 앞선다. 때문에 하나의 영화에서 조차 복합적인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 영화 내 등장인물이 가지는 시선은 물론이고,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시선까지 고려한다면, 영화에서 시선이 가지는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교묘하게 시선 사이의 일치를 만들어내는 영화에서 개개의 시선을 가진 주체 사이에 시지각적 위치의 차이를 지각되지 않은 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이것이 시선을 가진 주체의 문제라면, 시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맞은편의 자리에 보여지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시선을 가진 주체는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영화에서 시선을 작동시키기 위한 필연적 조건은 화면 안에 대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대상의 실재와는 무관하게 화면 앞에 등장시킬 수 있는 21세기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그 시선의 조건을 간편하게 완수한다. 거기에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옴니스코프(omniscope)의 계율이 더해져 우리는 화면 앞에 보여지는 존재에 대한 시선의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의심 조차 필요 없어진다. 그럼에도 어떤 영화들은 여전히 대상의 존재와 시선의 유무를 등식화하지 않은 채 성립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와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사랑의 시대>는 등식화되지 않는 시선의 작동 방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를 불안과 근심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영화들이다.     


<퍼스널 쇼퍼>에서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는 영매이다. 영혼의 신호를 기다리는 그녀는 죽은 루이스의 집을 찾아 그의 신호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에서 보여지는 것은 저 멀리 들리는 물소리와 함께 뒤늦게 확인한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 뿐이다. 틀어져 있는 수도꼭지 앞에서 더 강한 신호를 달라고 말할 때,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단순한 신호가 아닌 영혼의 가시화인 듯 하다. 그녀가 ‘unknown'의 메시지를 보고 흔들린 것도 메시지를 통해 영혼을 가시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가득하다. 앞서 얘기한 'unknown'의 메시지와 더불어 20세기 초 영적 존재의 영향을 받아 추상미술을 창시했다는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영상과 ’빅토르 위고‘가 영적 존재와 소통한 방식을 그린 60년대 TV영화를 Youtube를 통해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확인한다. 그녀는 분명 21세기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20세기의 추상 속 영혼의 존재를 시각적 대상으로 소화해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흥미로운 지점은 위에서 말한 가시적 방식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주체를 통해 존재에 접근하는 영화적 방식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 죽은 루이스의 집을 찾은 모린은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저녁, 테라스의 문을 거칠게 연 뒤 되돌아선 그녀는 정면에 놓인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멈춰서 있다. 물론 짙은 어둠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검게 물들어 있어 시선을 파악하기 힘들다. 이때 카메라 역시 그녀와 호흡을 맞춘 채 정지해 있다. 숨을 죽이고 있는 카메라. 그 순간 그녀가 나무로 된 바닥의 삐거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발짝 발걸음을 내밀자, 숨죽여 그녀를 지켜보던 카메라는 정확히 한 발짝 놀랏든 뒤로 물러선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객관적 기계장치가 아닌, 의식을 가진 누군가의 눈을 대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를 느낀듯한 그녀는 루이스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카메라가 대리한 시선의 주체가 루이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의식적 시선이다.     


카메라는 홀로 집 안을 둘러보는 그녀를 쫓는다. 집 안을 둘러보는 그녀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는 같은 속도로 따라가며 거의 일정한 크기로 그녀를 잡는다. 그녀는 집을 둘러보지만, 카메라는 집안을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그녀만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시점쇼트도 없이 진행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다. 반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루이스인지 확인할 수 없는, 카메라가 대리하고 있는 누군가가 '보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화면 안에 보이는 모린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영화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모린을 본다. 영화 안에 존재하는 대상과 시선을 가진 주체 사이의 괴리.     


이러한 장면은 모린이 아무도 없는 키라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에 홀로 들어오는 모린. 카메라는 멀리서 모린을 응시하며 반복적인 기계음이 공간을 채운다. 모린의 발걸음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는 듯 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미세한 시간의 생략 속에 공간을 건너뛰듯이 옮겨간다. 옷을 들고 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어느새 쇼트의 전환과 함께 방 안으로 이동하고, 침대 위에서 옷을 펼치다 갑자기 옷장에 옷을 정리하는 쇼트로 이어지며, 옷을 정리하던 쇼트는 거칠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는 쇼트와 연결된다. 맥주병뚜껑을 따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뛰어넘는 움직임은 루이스의 집에서 라이터 소리와 함께 다음날로 건너뛴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효율적인 편집을 위해 움직임의 연속성을 헤치면서 시간을 생략했다고 하기에 모린의 동선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1분 10초 동안 8개의 쇼트로 이어지는 위에서 언급한 짧은 씬에는 쇼트의 수만큼이나 많은 시간적 빈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빈틈은 카메라의 시선을 지각하게 한다. 화면의 중심에 모린을 둔 채 움직이기 때문에 빈틈은 카메라를 잡아당겨 끌고 오거나 힘을 주어 밀쳐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빈틈에 시선을 줄 수 없는 화면 속의 모린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퍼스널쇼퍼라는 직업을 수행한다. 반면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오는 모린을 멀리 떨어져서 응시하던 시선은 점프하듯 이동하며 자신의 날렵한 존재를 드러낸다. 때때로 이 시선은 모린을 감시하듯 위치를 바꿔가며 바라본다. 이 순간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시간의 생략을 통한 카메라로 대리된 주체의 시선이다.     


움찔거리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시공간적 연속성을 헤치는 편집의 방식은 카메라를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는 기계장치가 아닌, 주체적 시선으로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모린은 물론 우리 역시 시선의 주체를 볼 수 없다. 카메라를 대리한 시선의 존재는 영화의 화면에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서사 속에 담긴 영혼이라는 비가시적 존재와 비가시적 존재를 지각하려고 하는 영매라는 특성은 보이지 않는 주체적 시선의 위치를 부각시킨다. 앞서 말했듯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주체적 시선을 점유한 것이 누구냐를 사실보다도 보려는 시선 사이의 괴리이다. 영화 내에 존재하는 대상은 보려고 하지만 보지 못하고, 영화 내에 존재하지 않는 주체는 대상을 본다는 괴리. <퍼스널 쇼퍼>가 주는 불안과 긴장의 근원에는 이 괴리가 있다.     


보지 못하는 모린의 시선으로 시작한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조차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모린 주변에 존재하는 세 남성의 등장방식은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린이 옷을 돌려받기 위해 키라(노라 본 발드스타텐)의 집에 찾아 갔을 때 거기에 키라의 남자친구인 잉고(라르스 아이딩어)가 있다. 소파에 앉아있는 잉고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잡지사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정작 키라는 전화통화에 빠져있어 거실에 있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내일 다시 오겠다며 돌아서던 모린은 갑자기 뒤돌아 키라와 잉고 사이의 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뒤이어 모린은 처음 만나는 잉고에게 죽은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영매로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얘기한다.      

라라(시그리드 부아지즈)의 새로운 남자친구인 어윈(앤더스 다니엘슨 리)을 처음 만나는 장면 역시 비슷하다. 모린은 오만으로 떠나기 전 라라의 집에 들려 어윈을 처음 만난다. 이때 집 안에 있는 라라는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어윈은 모린에게 루이스와 영매의 능력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주변에 루이스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후 어윈은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 흐릿하게 집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잉고와 어윈 이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 밖에서 모린에게만 나타나, 모린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죽은 루이스와 영매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가 이내 장면에서 사라진다. 물론 그들을 모린의 눈에만 보인 유령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비가시적인 영혼의 신호를 쫓는 모린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잉고와 어윈의 존재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게 느껴진다.     


여기에 모린의 남자친구인 게리 역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모린과 게리는 오직 스카이프의 화상통화만을 통해서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 게리의 모습을 모린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대화의 방법이 문자가 아닌 오직 영상으로만 이뤄지며 정작 오만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는 점은 이상하다. 세 명의 남자 모두 오직 비가시적인 영혼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 앞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내 다른 이의 눈에 띄기 전에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모린 앞에 나타난 가시적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영화 내에 존재하는 모린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모린 앞에 하나둘씩 인물들이 가시적 존재로 등장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느껴지는 불안감에 대한 논의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하고 이제 막 오만에 도착한 모린은 이상한 소리가 난 문으로 다가간다. 문을 열었을 때 허공에 유리잔에 떠 있다가 떨어져 깨진다. 이를 루이스의 신호로 받아들인 모린은 비가시적 존재와 대화를 시도한다. 안식과 불안을 묻던 질문은 정말 루이스가 맞는지 의심한다. 모린이 “or is it just me"라고 물었을 때 들려온 긍정의 대답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린의 눈은 그 즉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불안감을 남긴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개입시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떠올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라라의 집에서 어윈이 사라지고 난 뒤 모린은 무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다. 그때 모린의 뒤로 어떤 남자의 형상이 유리컵을 들고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이내 사라진 남자의 형상과 허공에 떠있는 채로 이동하는 유리컵을 본다. 하지만 남자의 형상도 떠있는 컵도 보지 못한 모린은 깨진 유리컵을 그저 어윈의 실수로 파악한다. 앞서 모린의 눈앞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 인물들의 존재에 대해 관객인 우리가 의심하는 것처럼, 모린은 관객인 우리가 본 형상을 존재를 알지 못한다. 때문에 오만에서 허공을 떠다니는 유리컵을 보았을 때 모린과 관객 사이에는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것을 처음 본 모린과는 달리 우리는 어윈의 집에서 본 낯선 남자의 형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남성의 존재는 무엇일까. 그는 정말로 어윈의 말처럼 그녀의 주변에 있던 루이스일까.     


역시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거기에 나타난 이상한 형상화에 대해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영화의 도입부에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의 방식은 카메라를 대리한 주체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모린은 물론 우리도 볼 수 없다. 반면 남자의 형상과 떠있는 컵 장면에서 카메라는 고정된 채 어떠한 편집 없이 하나의 쇼트로 진행되며, 카메라를 대리한 주체의 자리를 인식할 수 없다. 대신에 이상한 가시적 대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난 남자의 형상은 단순히 서사적 미스테리에 빈틈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 내에서 복합적인 시선의 작동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카메라를 대리하여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제거된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모린의 생략된 시선과, 의심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동시에 활동한다. 다층적 시선 속에서 가시적 대상은 시선의 차이에 놓이게 되며 존재와 가시성의 괴리 속에서 존재는 의심의 자리에 놓인다.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모린의 모습은 카메라가 고정된 채 편집 없이 하나의 쇼트로 보여진다. “or is it just me"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 앞에 가시적 대상으로 나타난 모린의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 모린은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인 우리를 본다. 이 이상한 마주침은 앞서 우리가 보았던 다층적 시선의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 놓는다. 영화 속 대상이 관객을 보는 일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모린의 시선과 볼 수 있는 관객의 시선이 동시에 작동할 때 이러한 불가능한 시선을 가능하게 된다. 모린을 경유한 마주침의 시선을 통해 가시적 대상이 된 우리는 존재와 가시성의 불일치라는 질문 앞에 놓이기 된다. 결국 모린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영화를 보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확장되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불가능한 시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앞서 말했듯이 시선이 기능하기 위해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도된 일정한 부재는 시선 사이에 근심과 질문의 자리를 만든다. <퍼스널 쇼퍼>에서는 영화 속 화면 내에 존재하는 시선과 영화를 향하는 시선 사이의 충돌을 통해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반면 <사랑의 시대>는 영화 내에서 존재하는 그 시선 자체의 의심을 제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선에 대한 의심은 그대로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라는 영화의 목소리에 공명한다.     


<사랑의 시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묄레르 가족을 따라 낯선 집으로 초대된다. 100만 크로네라는 집의 가격에 한껏 들뜬 에릭(율리히 톰센)과는 달리 아내 안나(트린 디어홈)와 딸 프레아(마샤 소피 발스트룀 한센)는 집안 구석구석에 눈길을 준다. 여기서 안나와 프레아의 두 개의 시점쇼트가 등장한다. 에릭과 안나는 주방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큰 집에 살면 가족 사이의 유대감을 잃게 된다며 집을 팔자고 주장하는 에릭과 좁은 데 살면 속도 좁아진다고 얘기하는 안나 사이의 대화가 오간다. 이때 프레아는 문틀에 기댄 채 발로 TV를 밀어, 꺼진 TV 속의 텅빈 화면에 비친 에릭과 안나 사이의 대화를 보고 있다. 우리는 프레아의 시점 쇼트로 그 시선의 방향을 확인한다. 다른 하나는 안나의 시점 쇼트이다. 큰 집에 살면 유대감을 잃는다는 에릭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안나와 프레아는 위 층의 구석에 있는 방에서 소리를 내 1층에서 들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본다. 이때 계단을 오른 안나는 불현 듯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다본다. 계단을 내려다 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옅은 흥분이 내비치고, 그녀의 시점 쇼트로 내려다 본 구불구불 비틀린 계단은 조용히 그 자리에 있다.     


프레아의 수평적 시점 쇼트는 TV를 발로 미는 동작과 함께 다소 과잉처럼 삽입되어 있다. 안나가 계단을 바라보는 수직적 시점 쇼트 역시 뒤를 돌아보는 안나의 행동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시점 쇼트 자체도 서사에 포획되지 않는다. 두 개의 잉여의 쇼트는 앞서 들렸던 에릭과 안나의 대화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에릭과 안나의 대화에서 하나의 공간에서 공동체의 유대감에 대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아의 시점 쇼트는 가족을 하나의 화면으로 함께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안나의 시점 쇼트는 공간적 간격을 두고 소통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점 쇼트를 통한 질문의 시각화라고 얘기하기에 그들이 시선이 닿는 곳에서 영화는 쉽게 포획되지 않는 의문을 남긴다. 그 순간 프라아와 안나가 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두 인물의 눈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꺼진 TV 속 빈 화면을 통해 에릭과 안나의 대화를 바라보던 프레아는 그 시선을 그대로 집에 모여든 공동체에게 가져간다. 심장이 좋지 않은 빌라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일련의 소동에서 프레아의 시선은 그들을 위태롭게 바라본다. 이날의 장면은 찬송가를 부르는 합창단 속에서 빌라스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프레아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풀숲에서 올레와 모나의 키스를 바라보는 순간 역시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감이 스친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비추는 순간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춤을 추면서 에릭과 안나가 손을 맞잡고 즐거워 모습을 볼 때뿐이다. 그러다 프레아는 가장 먼저 빌라스가 의식을 잃는 것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되풀이 한다. 프레아의 불안한 표정은 공동체의 소통을 근심하고, 웃음은 가족의 지속을 희망한다. 무심히 반복되는 등장인물들의 얼굴 속에서 오직 프레아만이 공동체 속에서 불안을 바라본다. 때문에 프레아가 에릭의 외도를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외도를 보고 크게 놀라지 않는 이유는 이것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불안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혼자 있다는 거짓말과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라는 그녀의 말은 공동체의 불안 속에서 가족의 지속만은 지키고 싶었던 응답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묄레르 가족은 완전히 부서져 버리고 만다. 영화의 도입부에 꺼진 TV의 화면을 통해 에릭과 안나를 바라보는 프레아의 시선은 이 집에서 가족의 지속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라 밝혔다. 그렇다면 TV 속 안나 앞에서 프레아와 피터가 섹스를 하는 장면은 그 질문에 대한 처참한 대답일 것이다. 프레아와 피터가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그들의 맞은편 TV에는 뉴스를 전하는 안나가 있으며, 그녀의 시선은 프레아와 피터의 섹스를 향하고 있다. 물론 TV 속에 있는 안나가 프레아와 피터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TV의 사각형을 경유하여, 프레아의 볼 수 있는 시선과 함께 안나의 볼 수 없는 시선이 작동한다.     


안나의 볼 수 없는 시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프레아와 피터 사이의 섹스에 개입된 소리 때문일 것이다. 프레아와 피터의 첫 번째 섹스를 돌이켜 보면 거기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피터를 끌어안는 프레아의 표정과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만 있을 뿐 어떠한 흥분도 찾아볼 수 없이 고요하다. 반면 TV 속 안나의 시선 속에서 이뤄진 섹스에는 쾌락의 흥분과 함께 그들이 웃음소리가 채워진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 우리가 프레아와 피터의 섹스 전에 본 것은 늦은 저녁 홀로 누워있는 침대에서 에릭과 엠마(헬렌 레인가르드 뉴먼)의 섹스 소리를 듣는 안나의 모습이다. 안나는 에릭과 엠마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소리를 통해 그들의 섹스를 지각하고 있다.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듣는 안나. 비가시의 주체와 사운드의 활용은 TV 앞의 프레아와 피터의 섹스를 에릭과 엠마의 섹스와 겹쳐보도록 한다. 안나의 시선 앞에서 벌어지는 프레아와 피터의 섹스는 안나에게 그들의 집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음을 알리는 것이며, 안나에게 집을 떠나라는 프레아의 말에 앞서 안나에게 전하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영화에 도입부에 안나의 시선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그에 앞서 안나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얘기해야 한다. 안나는 계단을 보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계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단순히 이후로 영화에서 계단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개별적인 두 개의 공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공간은 공동체가 식사를 하고 회의를 하는 테이블 앞이다. 에릭과 안나, 프레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오직 테이블 앞에서만 존재한다. 분명 부동산 계약을 새로 하는 도입부의 장면에서 단면도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이 개별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지만, 그들은 오직 테이블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하나의 공간은 묄레르 부부가 머무는 침실이다. 그곳에서 안나는 에릭에게 공동체 생활을 제안하고, 에릭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프레아에게 들켰으며, 에릭과 엠마가 섹스하는 소리를 안나가 듣는다.     


두 개의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운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프레아가 안나에게 집에서 떠나라고 한 그날 저녁. 안나는 엠마의 짐을 태워버리자며 프레아를 깨운다. 역시나 계단을 생략한 채 2층과 1층을 오가는 이 장면에서 프레아는 안나를 말리기 위해 따라 나가며, 흥분한 안나는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 순간 공동체 구성원 중 누구도 안나의 외침을 듣고 달려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가장 위층의 구석에서 내는 소리를 1층에서 들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다른 구성원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는 이상한 방음현상이 작동한다. 앞서 얘기했던 에릭과 엠마의 섹스 소리는 안나의 귀에 명확히 들린다. 때문에 안나와 프레아가 몸싸움을 벌일 때 조차 아무 소리도 전달되지 않는 테이블 앞 공간은 에릭과 엠마의 섹스 소리가 들리는 침실의 공간과 하나의 집이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그 사이의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계단이 안나의 눈에는 보인다. 그리고 이는 안나의 꿈을 통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아나운서로서 직업을 잃은 채 헤매던 안나는 손에 흙을 묻힌 채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문에 너무 가까이 서있어 에릭과 엠마의 섹스 소리를 들었다는 안나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꿈 속에서 에릭은 계단을 올라와 자신과 섹스를 했다고 얘기한다. 그녀는 에릭이 계단을 올라왔단 얘기를 조금씩 바꿔가며 세 번 반복한다. 그녀의 꿈 얘기에서 중요한 것은 에릭과 안나의 섹스가 아니라, 에릭이 계단을 올라왔다는 환상에 있는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계단을 안나만이 보고 있다. 안나의 시선은 분명 프레아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질문으로 기능한다. 때문에 시선의 대상인 계단을 부재하는 방식으로 그리는 영화의 대답은, 안나의 질문에 대해 공동체는 불가능하다고 얘기하고있다.     


이처럼 <사랑의 시대>에서 두 개의 시점 쇼트로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던져질 질문은, TV 속 프레아와 피터의 섹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존재하지 않는 계단으로 대답된다. TV의 화면 속 인물이 프레아를 바라본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계단을 바라본다는 것은 각각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의 부재로 인해 불가능한 시선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불가능한 시선을 가능케 하면서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반면 <퍼스널 쇼퍼>는 존재하는 대상은 시선을 가지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하는 주체는 대상을 바라본다는 괴리에서 시작한다. 분리된 두 개의 시선 속에서 한 편에서는 대상을 보지 못하는 모린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등장인물의 존재를 의심하는 우리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모린과 우리의 시선이 마주칠 때 모린과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향해 존재에 대한 불안을 떠안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랑의 시대>의 근심과 보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퍼스널 쇼퍼>의 불안은 그렇게 데칼코마니처럼 시선을 통해 세상을 향한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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