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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Oct 17. 2017

#29 여전히 선택은 두렵다.

<미스터 노바디> 속 소년의 달리기가 멈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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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나는 미스터노바디를 보고 나는 이 문장을 적어놨다. ‘여전히 선택은 어렵다’ 나는 입사 2년 차 직장인이었다. 누구나처럼 조금의 만족감과 큰 불안감을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지켜내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있는 이들은 주변의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하는 동료들. 나보다 뒤처져 보였지만 어느새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하는 친구들. 그들의 작은 숨소리에도 나의 하루는 이내 폭풍우 한가운데 놓인 배처럼 넘어질 듯 흔들린다.


아마도 내가 가졌던 불안감의 근원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알 수 없음이 어떤 이에게는 기회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겁이 많은 나에게는 사방이 막힌 어둠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간을 겪은 당신이라면 굳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나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선택의 문제가 성인에게만 존재하겠는가. 그것은 미스터 노바디의 9살 소년 '니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앞에서 '니모'는 선택을 앞두고 있다. 아버지와 함게 남을 것인가. 어머니와 함께 떠날 것인가.


니모의 고민 뒤로 어떤게 진짜인지 알 수 없는 9개의 미래가 동시에 펼쳐진다. 9개의 시간은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 9살 소년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혹은 죽음을 앞둔 118살 노인이 떠올리는 기억일까. 천사가 기억을 지우는 것을 잊어 인중을 갖지 않고 태어난 니모는 동시에 펼쳐지는 9개의 시간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알든 모르든 소년은 여전히 선택이 두렵다. 9개의 미래. 선택과 사랑. 복잡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매끈하게 진행되는 영화를 보며 선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화 속 두 번의 달리기와 돌을 던지는 니모의 뒷모습에 대해서만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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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으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쫓아 따라간 곳에서 니모는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것을 본다. 바닥에 뜰어져 깨지는 붉은색 도자기에 이어, 니모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양쪽에 쥐고 있다. 이내 어머니는 기차를 타고 떠나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던 니모는 달리는 기차를 향해 달음박질한다. 손을 내미는 엄마와 뒤에서 부르는 아빠를 번갈아 돌아보는 니모의 달리기가 최대한 느린 속도로 지속된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발걸음은 마치 양쪽의 손 중 누구의 손도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있다.


소년이 선택한 것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118살 노인 '니모 노바디'가 들려주는 인생의 이야기 속에서 소년 '니모'는 아버지를 선택했고 동시에 어머니를 선택하기도 했다. 또한 '안나'를 잊지 못하기도 했고, '엘리즈'와 결혼하기도 했고, '진'과 아이를 낳기도 했다. 선택을 두려워하는 소년의 상상일 뿐이라는 노인의 대답으로 '니모 노바디'가 경험하는 복수의 미래는 명확히 설명된다. 심지어 그의 이름은 '노바디' 아무것도 아닌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닌가. 너무나 정확한 노인의 대답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이 영화가 가슴속에 남는 것은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 때문이다. 결국 노인은 눈을 감으며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뒤이어 눈을 뜨고는 밝은 웃음과 함께 시간은 역순으로 진행된다. 밝은 음악과 뒤로 걷는 사람들.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노인의 얼굴은 선명하게 웃고 있다. 말이 되지 않은 이 장면이 귀여운 이유는 노인의 얼굴에서 바로 전에 이어진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가 된 노인은 빠른 속도로 과거를 향해 달려간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9살 니모의 느린 발걸음과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118살 니모의 경쾌한 발걸음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는 한 소년이 서있는 기차역에 도착한다. 결국 이야기 속 실재 시간은 아버지의 손을 놓고 뛰기 시작한 순간부터 기차를 향해 달려가는 1분 남짓이 전부 일지 모른다. 나머지 니모는 전부 노바디 일 뿐이다.


마지막에 니모가 달려가는 곳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저 숲 속이다. 숲 속으로 달려가 도달한 곳에서 니모는 안나와 함께 웃으며 앉아있다. 그 시간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니모가 강가에 앉아 있는 안나를 바라본 것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과 포옹하는 것을 본 직후이며, 기차역에 도착하기 이전이다. 때문에 강가에 앉아 있는 니모와 안나는 니모의 선택과는 무관하다. 수많은 선택의 틈바구니 속에서 벗어난 니모가 도착한 곳은 결국 선택으로 소유가 불가능한 하나의 가상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평화로운 두 소년 소녀를 보면서 함게 미소지을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당신도 나와 함께 미소 지었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고민과 두려움이 아니라 간직하며 미소지어야 할 한 순간이라는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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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선택이 두렵다' 영화는 결코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게 할 용기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희망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겠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다는 믿음. 160분을 거쳐 수 많은 선택을 한 소년에게 그 믿음이 두려움 앞에서도 웃음지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선택을 걱정하는 대신 함께 웃을 수 있는 짧은 순간. 그 순간의 소중함. 선택을 앞둔 그대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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