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간 이야기에서 희망을 만들어낸 선택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 오사무와 쇼타가 마트에 들어간다. 어딘지 의심스러운 둘. 쇼타는 오사무가 시선을 가린 틈에 재빨리 식료품을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불룩한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베란다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 유리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 집의 구성원들은 이상하다.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그들은 서로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집에 공무원이 찾아왔을 때 도망치듯 피한다.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하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이상한 어느 가족.
※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은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내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드라마를 사랑하는 많은 한국 팬들 역시 이 영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언뜻 기존 고레에다 영화의 집대성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모른다>와 같이 남겨진 아이들로 시작하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혈육을 넘어 가족이 된다는 문제를 건드린다. 그러면서도 <걸어도 걸어도>와 같이 관계 속에 은폐된 개인적 감정과 상처를 머금고 있으며,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같이 화해의 시선도 남겨둔다. 하지만 이 영화를 고레에다 영화의 단순한 연장선 혹은 기존의 반복이라고 말하기엔 거기에서 치밀어 오르는 스산한 기운이 강렬하다. 이 영화는 분명 아름답다. 그들의 집 안에는 생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섬뜩하다.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위태롭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글들이 <어느 가족>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나는 거기에 담긴 섬뜩함을 얘기하려 한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섬뜩함 속에서 발견한 하나의 희망 정도가 될 것이다.
오사무와 쇼타를 따라 그들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곳은 온갖 짐으로 가득한다. 도통 관리가 되지 않은 이들의 공간은 그들의 정돈되지 않은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짐으로 가득한 집이라는 배경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집을 찍는 방식에 있는 듯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집의 구조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 가옥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이 집을 찍은 카메라가 만들어낸 미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좁은 집에서 그들은 밥을 먹을 때 한 곳에 모여서 먹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는 거실에. 누구는 주방에. 또 누군가는 좁은 방에. 좁은 집으로 인해 서로 흩어져서 생활하는 그들을 카메라는 나눠서 바라보고 공간 역시 그만큼 나눠진다.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졌을 이 좁은 집은 그것으로 하나의 세상이며 동시에 미로이다. 이 미로 같은 공간을 버티고 있는 것은 버려진 인물들이다.
유리가 사라진 뒤 유리의 부모는 아이를 찾지 않는다. 이건 동시에 아이가 집에 방치되든 사라지든 누구도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찾지 않는 것은 쇼타와 아키도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스스로가 부모를 찾지 않는 것인지, 부모가 아이를 찾지 않는 것인지 불명확하지만 그 사이에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었고 사회는 그 아이들의 위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부모 세대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츠에는 연금을 수령하지만 복지사의 말처럼 그에게 최선의 위치는 요양원이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일용직과 비정규직으로 일하지만 부상과 해고에 너무나 쉽게 직업에서 내팽개쳐진다. 회사에서 잘린 그들의 생존을 지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이다. '만비키'는 '물건을 훔치는 행위. 또는 그 사람'을 말한다. 제목처럼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은 절도이다. 연금을 받는 할머니와 일용직으로 일하는 어른 사이에서 도둑질은 그들의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어느 가족'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을 찾지 않는 사회의 시스템이 있다.
한편 사회 시스템에서 잊혀진 그들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배경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키가 오사무에게 노부요와의 섹스 없는 부부관계에 대해 묻자 자기들은 가슴으로 연결되었다고 답한다. 하지만 아키는 돈 때문이 아니냐고 다시 물을 때, 오사무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노부요가 쇼타, 유리와 함께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폭력에 놓인 아이에 대한 연민인가 아니면 영화의 후반부 질문처럼 아이를 갖지 못한 이의 질투인가. 하츠에는 왜 아키와 함께 사는가. 아키에 대한 애정일까 아니면 또 다른 질문처럼 원한일까. 그것도 아니면 돈인가. 수많은 질문을 남기는 하지만 명확한 답을 내기를 꺼리는 어쩌면 그 자신들조차도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 관계의 지속에 관한 질문은 영화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집만큼이나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럼에도 이 미로 같은 집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일상이 아름답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마트에서 훔쳐온 음식을 나눠먹을 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분명 따뜻한 일상이 있다. 특히나 그들이 한데 모여 울창한 나무의 틈 사이로 불꽃놀이를 구경할 때 그들이 얼굴이 한데 모인 아름다운 장면은 그들의 공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절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가족을 만들어낸 배경은 위태롭기에 자그마한 균열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오사무와 노부요가 일자리를 잃고, 하츠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세상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어린 쇼타이다. 오사무는 어린 유리에게도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쇼타 뿐이다. 슈퍼의 할아버지에게 도둑질이 들켰을 때, 쇼타는 이제 멈춰야하는게 아닌지 불안해하지만, 오사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때문에 가족의 균열을 가장 먼저 겪는 것이 쇼타인 것은 당연하다. 오사무의 절도가 갈수록 과감해질 때, 그리고 진열된 물건은 주인이 없는 거니 훔쳐도 된다는 오사무의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쇼타는 더 이상 도둑질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하츠에의 죽음과 함께 갑작스럽게 돈이 생긴 오사무가 더 이상 도둑질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쇼타는 길거리에 유리의 손을 잡고 서있다. 유리의 위태로운 도둑질을 지켜줄 어른이 부재하고, 유리는 자신의 위태로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쇼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끔찍한 선택을 통해 경찰에 잡히게 된다.
위태로운 가족은 사회에 발각되고, 그들은 원래의 집과 교도소 보육시설로 각각 흩어진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원래 자리일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쇼타는 홀로 버스에 올라 보육시설로 돌아가고, 유리는 폭력이 깃든 원래의 집으로 돌아와 처음 쇼타를 만났던 테라스에 홀로 서있다. 그럼에도 이 지독한 현실의 반영에서 우리가 그들을 응원할 수 있는 것은 세상과의 불협화음에서 가족을 위한 쇼타의 선택 때문일 것이다. 쇼타의 대담한 선택은 이 가족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지만, 그것은 불안한 가족을 더 이상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결심이다. 이 영화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를 본 우리들이 가진 이 어린아이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위태로운 하지만 지켜보고 싶은 그 순간에 나는 쇼타의 결심을 통해 희망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