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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ul 24. 2018

<주피터스 문> 이토록 무력한 비행이라니

칠흑 같은 어둠. 시리아인들이 조그만 배를 타고 헝가리 국경을 넘는다. 시리아 난민 '아리안'은 국경을 넘던 중 경찰 '라슬로'의 총에 맞는다. 총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아리안은 역설적이게도 중력을 거스르는 능력을 얻게 된다. 우연히 아리안의 능력을 본 의사'스턴'은 아리안을 돈벌이에 활용할 궁리를 세운다. 신비할 능력을 지닌 '아리안' 이를 돈벌이에 활용하려는 의사 '스턴' 그들을 쫓는 경찰 '라슬로' 공중을 부유하는 아리안의 능력을 중심으로 난민, 종교, 테러, 속죄의 테마를 헝가리 도심 한복판에서 풀어낸다.



하늘을 날았지만, 자유는 없다


하늘을 나는 능력은 그 매력만큼이나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장 익숙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의 슈퍼히어로 들이다. 그들의 능력은 그 이름에 걸맞게 그들에게 힘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를 담는 카메라는 보통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집중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빠른 속도감과 이를 보는 쾌감이다. 조금 더 멀리 나가 우주를 유영하는 이들도 다른 의미에서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아마도 이 분야에서 가장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영화는 '그래비티'일 것이다. 3D로 제작되어 우주라는 공간감을 그대로 경험하게 한 이 영화의 카메라는 우주라는 공간의 광활함과 이 속을 떠다녀야 하는 인간이 지구와 가지는 무한한 거리감에 집중한다.



여타의 영화들이 하늘을 나는 능력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혹은 그들이 떠다니는 공간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에 비해 이 영화 속 아리안의 비행은 어떠한 자유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일차적으로 비행을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아리안이 자신의 능력을 감당하지 못 한 채 하늘로 떠오르면 카메라도 그와 함께 공중으로 상승한다. 상승한 카메라는 공중에서 몸을 돌려가며 회전하는 아리안의 주위를 공전하듯 움직인다. 이때 아리안의 뒤로 비치는 공간과 아리안의 육체는 마치 서로 다른 중력장에 머무는 듯 각자의 방식으로 비틀며 움직인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도 상승하는 아리안을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아리안의 움직임은 강력한 상승이라기보다는 무력한 회전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이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리안의 능력이 활용되는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리안의 능력을 확인한 부패한 의사 스턴은 이를 돈벌이에 활용한다. 스턴은 돈 많은 환자들에게 다가가 아리안을 자신의 아들이자 천사라 소개하며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돈을 갈취한다. 동시에 아리안의 능력은 자신을 쫓는 경찰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빈번히 활용된다. 그의 능력은 도피와 돈벌이의 수단일 뿐 슈퍼히어로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누군가를 피해 혹은 타인에게 이용당하면서 하늘을 상승해야 하는 아리안은 자유로이 날지 못하고 어지럽게 회전할 뿐이다. 차라리 그것은 지상에 편하게 두 발로 서지 못한 채 저 공중으로 내쫓긴 것처럼 보인다. 난민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공중으로 내쫓겨야만 하는 아리안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그 모습을 담는 카메라에서 어지럼증을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영화적 선택일 것이다.


그는 천사인가. 재앙인가.


하지만 여기서 모순된 점은 아리안의 능력을 확인한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혹은 천사로 여긴다. 아리안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마치 그가 전지적 권능을 가진 존재라도 된다는 듯이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본다. 구원적 존재로서 아리안을 그리는 순간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지하철 테러 현장 맡은 편 건물의 옥상에서 보여진다. 신을 봤다는 한 여인의 시선을 따라 올라간 건물의 옥상에서 스턴은 아리안을 발견한다. 스턴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아리안의 신발끈을 묶어주려 하자, 아리안은 스턴의 머리에 손을 올린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과 스턴의 시점에서 로우 앵글로 바라본 아리안의 얼굴이 합쳐져 이 장면에서는 선명한 종교적 구원의 색체를 느낄 수 있다.


아리안은 정착할 수 없는 난민인가. 아니면 신을 잃은 자들의 구원자인가.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두 세계는 아리안을 통해서 영화적으로 공명한다. 지상에 발닻지 못하는 난민의 영화적 형상으로 시작하여 이를 전지적 권능을 가진 영적 존재와 겹쳐놓는 영화적 선택은 현재 유럽의 난민 사태와 겹쳐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화해는 마침내 찾아온다



호텔에서 경찰에게 도망쳐 창문을 깨고 달아난 아리안은 역시나 공중에 떠있다. 그를 발견한 시민들은 하나하나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점점 멀어지며 이를 부감으로 담고 있다. 이 순간 난민 소년을 향해 가해졌던 폭력도 위협도 모두 사라진 채 세상은 평화롭게 유지된다. 감독의 전작 <화이트 갓>에서 난폭해진 개들이 트럼펫 소리와 함께 소녀와 바닥에 몸을 데고 누었을 때, 그들의 모습은 부감으로 찍혔다. 영화 속 모든 폭력을 일순간 화해시키는 <화이트 갓>이 부감 쇼트는 <주피터스 문>에서 이렇게 다시 한번 반복된다. 도피와 구원, 난민과 도시의 화해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만큼 이 영화는 분명 보는 이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과 마주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순간의 평화만큼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다가온다. 이 현기증 나는 세상에 화해는 그렇게 마침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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