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근심하는 이상한 방법
당신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인물 행동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사건은 우스꽝스럽게 벌어진다. SF영화를 기대하며 온 관객이 찾을 박진감이나, 구로사와 기요기 영화를 기대하며 온 관객이 찾을 긴장감도 떨어진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은 거기에 담긴 이상한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근심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 다가가기 위해서 먼저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생명체의 육체에 침입하는 일이다. 육체를 옮겨가며 존재하는 그들은 마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처럼 보이며, 동시에 육체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지(마츠다 류헤이)는 자신이 나루미(나가사와 미사미)의 남편인 신지의 육체인지, 지구를 침략하러 온 외계인인지 혼란스럽다 말한다. 물론 이 혼란은 다른 이의 육체에 의존해야 하는 외계인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이것을 정신과 육체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지구에 머무는 순간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의 마주침과 그것으로 인한 오인이라는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이상한 인간과 외계인의 이형 조합으로 존재하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인간이 가진 개념을 빼앗는 일이다. 외계인은 인간이 언어의 의미를 상상하게 한 다음 이것을 빼앗는 방식으로 개념을 습득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은 해당 개념을 상실한다. 가족. 직업. 자신과 타인. 소유. 그들이 빼앗는 인간의 개념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상실한 인간들은 기존과 다른 행동들을 보인다. 소유의 개념을 잃어버린 히키코모리가 사람들 앞에서 설 수 있게 되고, 직업의 개념을 잃어버린 사장이 회사에서 아이처럼 뛰어노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개념의 상실이 꼭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결과를 미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상실 혹은 빼앗김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개념의 상실은 그 개념이 그것을 가졌던 인간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이 때문에 개념에 구속되었던 인간은 개념의 상실로 인해 장애를 입기고 자유를 얻기도 한다.
개념을 빼앗겼을 때 발생하는 낯선 반응들은 그들을 쫓는 인간들의 무리와 연결해 생각해봐야 한다. 정장 차림으로 조용히 등장하던 그들은 어느새 중화기로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 무리를 위협한다. 중년의 남성은 자신을 자위대로 소개하지만, 커다란 검은색 밴을 타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보며 사쿠라이는 그들이 자위대가 맞는지 의심한다. 물론 우리가 영화 속에서 그들의 진짜 정체를 밝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점은 그들이 현실적인 국가의 대응에 비해 과장되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사쿠라이 무리를 향한 위협이 강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과잉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공격은 위협적이기보단 코믹적이라는 뜻이다. 그것의 정점은 사쿠라이를 쫓는 폭격기 장면일 것이다. 사쿠라이 한 인물을 공격하기 위해 폭격기가 동원되었다는 설정이 과함은 물론, 폭격을 피하는 사쿠라이의 동작과 폭격으로 인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이 과장된 형상은 신지와 나루미가 찾은 병원 속 환자들의 모습에도 반복된다. 신지와 나루미는 다시 방문해달라는 의사의 전화에 병원을 찾는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정신질환을 앓는 혹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모습은 개념을 잃은 인간들의 행동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 외계인이 개념을 빼앗은 결과인 걸까. 우리는 직전에 사쿠라이 무리를 쫓는 남자에게서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의사는 바이러스로 인해 병원에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어디서 온 것일까. 혹은 그것은 진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은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인해 병원에서 북적이고 있다.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바이러스는 영화 속에서 오히려 외계인보다도 세상을 혼란하게 만든다.
지구의 종말을 알아채 버린 나루미가 차창으로 비쳐오는 강렬한 빛을 바라보며 인류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냐 묻는다. 비장한 이 장면에서 우리 역시 그 빛을 종말이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외계인인 신지는 이것을 그저 석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이 코믹한 장면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 영화의 중요한 태도를 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 명의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도착한다. 인간의 육체에 의존하지 않고는 존재하지도 못하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들이 지구에서 하는 거라곤, 인간의 개념을 빼앗는 것이다. 인간의 개념을 빼앗는 그들의 행동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개념의 상실 뒤에 나타나는 인간의 태도는 우리에게 삶을 숙고하게 한다. 반면 사쿠라이 무리를 쫓는 자위대와 병원에서 원인 없는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모습은 현실을 스펙터클로 만들려는 과장이 가득하다. 매일 반복되는 석양을 보고는 인류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버릴 수밖에 없는 그 허무함 속에 이 영화의 근심이 있다.
지구에서 인간들의 행동은 과잉으로 넘쳐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거듭 미끄러진다. 오히려 개념이 빠져나갔을 때, 그들은 그제야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지금 과잉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어떤 개념은 오히려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중에서도 우리가 간직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우스운 덧셈과 간절한 뺄셈. 어쩌면 결말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무엇으로 바꿔도 좋은 상투구였을지 모른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위태로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빠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