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inem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근긍 Jul 17. 2019

<로데오 카우보이> 꿈처럼 반복 될 놀이


# 1.


말의 단단한 육체와 거친 호흡. 최대한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카메라의 시선에 이어 한 남자가 천둥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 한눈에 보기에도 머리에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브래디. 더는 말타기를 할 수 없게 된 로데오 카우보이. 영화는 그 절망이 도착한 이후에 시작한다.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타고 버티는 경기인 로데오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의 솜씨를 겨루는 데서 시작한 대표적인 서부의 놀이이다. 동시에 여전히 경기 도중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는 죽음의 놀이이다. 그 때문에 로데오 카우보이 브래디의 꿈을 향한 도전과 실패로 영화의 서사를 정의하기에는 그 운동이 만들어내는 육체의 파괴가 너무나 일상적이며 예견되어있고 동시에 치명적이다.

영화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사고 이후 겪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도 특별할 것 없는 드라마의 일부일 뿐이다. 그보다 카우보이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보여지는 무력한 육체이다. 브래디가 자신의 말 거스를 보러 갔을 때 브래디 아버지의 친구 프랭크는 손을 잃어 그 대신 갈고리를 낀 상태이다. 브래디의 상처나 발작으로 잘 쥐어지지 않는 손가락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갈고리를 끼고 있는 남자의 손상된 육체가 갑자기 등장했을 때이다. 그 남자의 손이 실제로 카우보이의 삶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보여지는 이 순간은 그들의 상처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상황임을 보여준다.

깊은 밤 농담과 함께 브래디를 찾아온 그의 친구들은 브래디를 데리고 황야로 나선다. 모닥불을 피우고 함께 달리며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둘러앉아 각자가 겪었던 사고의 경험을 얘기할 때, 조심스럽게 카메라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담는다. 짙은 어둠과 모닥불의 그림자로 연출한 카우보이들의 얼굴은 각자가 겪었던 사고의 경험과 어우러져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이미지를 뛰어넘는 충격은 우리가 레인을 봤을 때 느껴진다. 친구들의 대화에서 세계 챔피언이 될 뻔했다던 레인의 이야기와 함께 재활병원에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갈비뼈나 손이 부러졌을 거라 상상하게 되지만, 뒤이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마비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레인의 무력한 육체이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함의 이미지는 카우보이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순간일 것이다.



# 2.


브래디는 카우보이 중에 사고를 당했다. 영화는 로데오 중 느껴지는 어떠한 흥분도 없이 그 사건 이후를 다룬다. 우리가 로데오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핸드폰의 작은 화면을 통해서 뿐이다. 핸드폰 속 그들은 열렬한 환호 속에 길들여지지 않은 성난 짐승에 올라타지만, 정작 그 좁은 액정을 보는 그들의 현재는 말에 올라타는 것조차 버겁다. 무력한 현재의 시간에서 로데오를 대신하는 것은 말타기를 흉내 내는 몸짓이다. 브래디는 친구에게 로데오를 가르쳐주면서 말 모형에 앉아 힘차게 발을 내 뻗는다. 그리고 레인의 재활 치료에 찾아가 카우보이 옷을 입히고 떨리는 손으로 줄을 겨우 잡게 한 채 당기도록 한다.

그들의 제한적인 몸짓과 정반대에 있는 장면은 브래디가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장면이다. 말타기에서 떠날 수 없는 브래디는 몸을 회복하는 동안 의사의 충고를 무릅쓰고 야생의 말을 길들이는 것으로 돈벌이를 한다. 새로 산 말 ‘아폴로’는 그 희망의 시작이다. 혼자 날뛰던 아폴로가 브래디의 말을 따르고, 브래디가 아폴로를 탄 채 평원을 달리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자유롭고 희망적인 순간일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던 너른 평원과 암벽을 뒤로한 채 함께 달리는 브래디와 아폴로의 모습은 우리가 말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영화의 서사 속 브래디의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이다.



# 3.


하지만 그 순간은 당연하게도 오래가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말에서 쓰러지는 브래디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의 죽음을 통해서라는 점이다. 어느 날 철조망의 핏자국과 함께 아폴로가 사라진다. 뒤이어 찾은 아폴로의 다리는 철조망에 찢겨 더는 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 아폴로를 안락사시키는 총성에 이어 석양이 지는 평원 위로 브래디와 브래디의 아버지 그리고 쓰러진 아폴로의 육체가 그림자 져 있다. 아폴로의 죽음이 잔인한 이유는 그 죽음의 방식보다도 죽음이 도달한 지점의 역설 때문일 것이다. “말은 평원을 달리기 위해 카우보이는 말을 타기 위해 태어나지”라는 브래디의 말은 아폴로가 죽어야 했던 이유와 브래디가 다시 로데오 대회에 나가려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려는 슬픈 정명이다.

하지만 ‘말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브래디를 다시 로데오 대회를 향하게 하려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휘파람 소리와 충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며 말이 쓰러졌을 때, 카메라는 거기서 한 발짝 물러나 롱숏으로 그들을 보여준다. 평원은 말이 죽은 공간이다. 동시에 앞서 말했듯 브래디와 말이 함께 달렸던 유일하게 자유로운 순간의 공간이다. 말이 달리던 공간에 죽음이 대신 자리한다. 그것은 말에게만은 아닌 것 같다. 카우보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곳을 뛰어넘을 때, 그리고 각자가 죽을뻔했던 사고들을 회고할 때, 카우보이들의 위치도 죽음과 멀리 있지 않다. 말을 타는 동시에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로데오와 닮아있다.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우리는 연결돼 있다”라고 말하는 카우보이 친구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곳을 벗어나려던 아폴로는 철조망에 찔려 더는 뛰지 못한다. 가장 자유로운 달리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는 그 평원에서 아폴로는 멀리 가지 못한 채 서 있다. 어쩌면 아폴로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철조망에 찔렸기 때문이 아니라 로데오의 공간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로데오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브래디도 마찬가지이다. 더는 멀리 가지 못하고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모른 채 브래디는 그곳을 배회한다.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려 했다가 포기하는 과정의 반복은 평원을 달리던 말의 달리기와 총소리와 함께 종결된 말의 죽음을 닮아있다.



# 4.


로데오 대회에 출전신청을 했지만, 브래디는 포기하고 돌아온다. 브래디는 분명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데오 대회를 떠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계속 맴돌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그 맴돎의 연장이자 슬픈 정명을 이은 질문일 것이다. “말은 평원을 달리기 위해, 카우보이는 말을 타기 위해 태어나지.” 그렇다면 달릴 수 없는 말이 죽었을 때, 말을 탈 수 없는 카우보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브래디와 레인이 손을 맞잡고 말타기를 흉내를 낼 때, 육체의 한계 앞에 무력한 두 인간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말을 타는 브래디의 이미지는 브래디의 상상이자 레인의 상상이다. 동시에 그것은 평원을 달리는 말의 꿈이기도 하다. 평원을 가르는 저 슬픈 달음질의 꿈은 그들이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린 온 피트> 길 위의 시간 속 소년이 본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