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 2|너희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요리란다.
'배고프지 오빠가 요리해줄게'
노란색 유치원복을 채 벗지 않은 채 나는 식탁에 앉아
그의 특급 요리를 기다렸다.
그는 냉장고에서 빨간 케첩과 희어 멀 건한 마요네즈를 꺼내
작은 앞접시에 덜어내곤 젓가락으로 마법을 부리듯
입으로 휘휘 소리를 내며 저어댔다.
그리곤 금색 왕관이 빛나는 금성 전자레인지에
20초가량을 돌리고
따끈한 소스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곤
'그래, 이맛이야' 했다.
뭐라도 입에 넣어주면 감사한 유딩은
능력 있는 초등학생 오빠를 둔 것에 만족하며
그 주황빛 소스를 열심히 찍어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던 그 요리는
그가 학업에 정진함에 따라 맛볼 기회가 사라지면서
내 미각에서도 잊힌 맛이다.
이후,
종종 그가 달걀프라이를 하다 프라이팬에 불을 내는 모습을 보며,
탐탁지 않아하던 여동생은 그를 그렇게 기억하며 자라났다.
(물론, 귀차니즘 호르몬으로 만사가 귀찮은 고3병 환자 덕에
마지막 식초 3방울로 깔끔한 맛을 낸 라면을 끓여주는 여동생 같은 주방이모는 간간이 수고비를 챙겼던 것 같다.)
더구나 대학교 시절 자취를 하면서도 피자, 치킨을 시켜
냉장고에 쟁여놓고 지내는 그를 보며
같은 피도 어쩜 이리 다르니 놀랍다 놀라워했는데
그것은 반전을 위한 서막이었을까.
1여 년 전 신혼의 삶을 시작한 그는 아내를 따라 다시 요리의 세계에 입문,
놀러 온 여동생에게 아침에 에그 스크램블 정도는 거뜬히 해내는 착실한 오빠가 되어있었다.
그날 이른 아침에 새언니는 자고 있고, 부엌에 덩그러니 그와 있는데
신기하게도 유치원 시절 좁다란 부엌에서 뭘 해보겠다고 들썩이던 초등학생 오빠가 보이더라.
이후에도 종종 새언니 옆에서 입으로 요리를 거드는 모습을 보면('입만 살아가지고' 생각이 드는 건 사실)
새사람이 된 것인지, 옛사람이 부활인지 헷갈리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특제 요리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달콤하고 오묘한 맛,
새우깡에 찍어먹으면 더할 나위없이 깊은 풍미를 자랑하는 그 소스는
올 가을 태어난 조카가 유치원에 들어간다면
이 고모가 해주고 싶은 1순위의 요리겠다.
물론 소금이 너의 건강을 고려해
유기농 계란으로 만든 마요네즈와 믹스 요리에 정석인 하인즈 케첩을 쓰고 샐러리에 곁들여주겠노라.
그럼 소금이 가 잘 배워서 나중에 여동생한테 해주겠지.
이것이 너희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요리란다.
p.s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어떤 것이 오리지널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재료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어 만드는 방법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어느 셰프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은 1980년대 후반까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양식 소스로 인식되었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샐러드에 무조건 이 소스를 곁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
* 오빠 오랜만에 추억 탈탈 털어봤어 맛있네
* 본 글은 개인의 경험에 근거한 푸드에세이로
공감이 없더라도 한 개인의 사고에 의한 사실적 묘사임을 알립니다.
* 개인의 다른 기억을 덧붙이셔도 지구온난화나 제3세계 기근에 악영향이 없으니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