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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Dec 22. 2021

의미 있는 일

2021. 12. 21. 변호사 업무 일지

 변호사로서, 형사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하는 사건이었다. 사기죄로 고소하는 사건이었고, 피해 금액은 20억이 넘었다. 피해자들은 평범한 가정주부이거나,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모은 1억~2억을 투자했는데, 모두 돈을 받지 못했다. 고소인은 총 6명이었는데, 그 때문에 세종경찰서에 다섯 번이나 가서 고소인 조사를 동석했다. 고소인 조사는 보통 3~4시간 하고, 왔다 갔다 하는데 4시간은 드니, 한번 조사하면 하루가 간다.

 

 고소한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고소인이 많고, 사실관계도 복잡하다 보니 조사가 길어졌다. 그래도 사건은 어찌어찌 막바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의 고소인들 중 대표자(편의상 '대표 의뢰인')가, 고소인 1명을 더 추가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탐탁지 않았다. 사건이 마무리 단계여서, 하루빨리 검찰로 보내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게 더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고소인 1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가해자의 처벌이 달라질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피해 금액은 1억 5천만 원 정도. 그래도 진행하고 싶다고, 수임료도 입금하겠다 하니 그러자고 했다. 먼저 이메일로 자료를 넘겨받아 검토한 뒤, 전화로 피해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중년의 여성이었다.


 처음에 받은 인상은 낯설음이었다. 피해자답지 않게, 분노에 차 있지도 않고 밝게 대답하고, 돌려받지 못한 1억 5천만 원에 별로 미련이 없어 보였다. 기억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거액을 사기당한 피해자들은 3~4년 전 일도 또렷이 기억한다. 사소한 일조차도 혹시 도움이 될까, 변호사에게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난다. 그런데 그녀는 정 반대였다. 이 차용증은 언제 쓴 거냐고 물으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1억 5천만 원을 이체한 증거가 있냐고 하면 웃으며 저번에 보낸 게 다라고 한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성의 없는 답변이다.


 참다못한 나는 '1억 5천만 원이 의뢰인 분에게는 작은 돈이어서 기억을 못 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이렇게 답변하시면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도 불리하다.'라고 이야기했다. 좀 더 자세히 답변을 해달라고 주문하자, 그제야 그녀는 '제가 약을 먹어서.. 기억을 잘 못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자세히 물으니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고 있다고, 그래서 옛날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대표 의뢰인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대표 의뢰인을 통하니 오히려 사실관계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찌어찌 어렵게 추가 고소장을 작성해서 경찰서에 냈다. 한 달 뒤 조사받으러 오라는 답신을 들었다.


세종경찰서에서 그 의뢰인을 만났다. 조사시간 30분 전에 미리 만나 간단한 수칙을 전했다. 그녀는 한 달 전 내가 전화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는 1억 5천이 적은 돈이어서 기억을 못 한 게 아닌데,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하다고 했다. 우울증 약을 먹다 보니 기억력도 흐려지고, 한 문장을 제대로 말하기 힘들어졌다고, 그래서 고소인 대열에 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뒤늦게 고소를 진행한다고 했다.


 면목이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1억 5천을 사기당한 일로 남편과도 사이가 안 좋아져 이혼소송까지 갈 뻔했다고 했다. 남편 몰래 투자한 금액을 뜯겼으니, 남편으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들었다고. 자신을 자책하며 우울증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약을 먹으니 정신이 흐려져서 직장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자기가 경찰 조사를 간다고 하니 남편이 제대로 말할 수 있겠냐고 걱정했다고. 지금도 자기는 무섭고 떨리고 경찰서도 처음이라고.


나는 대뜸, 사기를 당한  의뢰인의 잘못이 아니고, 잘못한 것은  사람이니,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으며, 자책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몇마디 말에 의뢰인은 눈물을 보였다. 오늘 고소인 진술을 매끄럽게 하지 못해도 좋고, 옆에 있는 내가 정리해서 이야기해줄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으며, 조사 시작할  항우울증 약을 먹고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을 내가 대신하겠다고 했다. 의뢰인은 조금 안심한  보였다.


그리고 나는 덧붙여서, 오늘 고소인 조사의 목적은 가해자의 처벌이지만,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하더라도 의미가 있다. 내가 받은 피해를 국가기관에 신고하고 가해자의 처벌을 원한다고 말하는 기회가, 어쩌면 의뢰인에게도 그간 묵은 감정을 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있는 그대로 진술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수사관은 젊은 여자였다. 말이 짧고 간결한 것이, 무뚝뚝하지만 일 처리가 명확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처음에, 내 의뢰인이 사기를 당하여 가정 불화와 자책감에 3년 전부터 우울증 약을 먹고, 때문에 기억이 흐리고 진술이 어설플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수사관은 진심으로 양해해 주었다. 조사 중간에 의뢰인이 눈물을 글썽이자 커피를 타서 주기까지 했다. 고소인(피해자) 조사를 2년간 해 왔지만, 수사관이 커피를 타 준 것은 처음 보았다.


수사관은 의뢰인의 말을 매끄럽게 수정하고, 끊긴 단어를 잘 정돈해서 한 문장으로, 또 여러 문장으로 이어주었다. 출력된 조서 초안을 보아도 고칠 것이 없었다. 조사는 손쉽고 빠르게 끝났다. 의뢰인과는 KTX 역에서 헤어졌는데, 나는 조심히 가시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뢰인에게 어떠한 위로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말로도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번복할 수도, 그녀의 지난 3년을 위로할 수도 없어 보였다. 어쭙잖은 위로가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의뢰인이 조사 전에 했던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가 하는 이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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