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어버이날의 기억
5년 전 어버이날에 블로그에 서로이웃 공개로 올렸던 글인데, 당시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 싶어서 가져와본다. 아예 만나지 않으니 감정도 옅어진 건지, 더 이상 친족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인지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사람으로서 불쌍한 인생을 살긴 했다. 가난한데 배운 게 없어 가난을 탈출하지 못했던 조부모 세대의 평범한 한 인간이라고 할까.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내 가치관에서 평가한다면 정말 다시는 내 인생에서 엮이고 싶지 않은 구질구질한 노란장판 감성의 밑바닥 인생. 결혼 스토리는 잘 모르겠으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남편이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 하니 (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내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노름을 좋아했다나?) 닥치는 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자식들을 건사한 사람. 하루하루 생존이 급급했기에 생활이라는 말은 사치였을 거고, 그랬기에 자식 교육도 실패한 거겠지. 아들들을 그렇게도 끔찍이 여겨 며느리들을 구박하는데, 남편한테 맞고 사는 자기 딸은 이혼도 못 시키는 그런 사람. 그런데 또 맞고 사는 딸 불쌍하다고 시장통에서 도라지 까서 버는 푼돈 모아 딸한테 퍼주는 그런 사람. 외손주가 첫 손주면서 큰아들의 큰딸인 나를 첫 손주라 하던 사람. 날 아끼긴 했던 것 같은데 1년에 두어번 보는 그런 상황에서 얼굴만 봤다 하면 기집애 기집애 타령을 하며 키 크다 많이 먹는다 공부 잘 해서 뭐하냐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고 잔소리를 하던 사람. 그렇게 살아 결국 기집애 기집애 하며 잔소리하던 손주는 당신 얼굴을 안 보고 살길 택했고, 끔찍이도 아끼던 큰 아들은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끔찍하게 이기적이다.
이런 인간 군상들을 볼 때면, 역사 속 인물은 입체적이라던 모 교수님의 수업이 떠오른다. 한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사료를 따라 쭉 관찰해나가다 보면, 결국 그 인물에 대한 감정은 배제되고, 무섭도록 객관적으로 그 인물을 평가하게 된다. 지금 내가 아무런 감정 변화 없이 이 글을 읽고 이렇게 생각을 끄적이는 것도 그저, 나 자신이 작성한 과거의 사료를 읽고, 이 단편적인 정보들로부터 한 인간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2016/5/8 작성)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집애가 키가 그렇게 커서 무얼 하냐, 이제 그만 커라", "기집애가 공부해서 뭐하냐, 적당히 해라"
명절마다 이따위 말들을 들어왔기에 나는 자연스레 할머니가 싫어졌다. 거기에 남동생이 둘이라 남자 남자거리는 소리가 너무 싫었다.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돈도 없고 자식도 못나게 낳아 놓고는 며느리 도리를 바라는 할머니가 싫었다.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아도 남편 잘못 만나서 평생을 고생만 하는데 거기에 할머니까지 짐처럼 얹혀 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첫 손주는 내가 아니었다. 고모가 낳은 사촌오빠가 첫 손주였다.
그런데 장남인 아빠가 장녀인 나를 낳고 나서 할머니한테 첫 손주는 내가 되었다.
그 당시에도 할머니는 지금 살고 있는 제기동에 살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창원에 살고 있었다.
나를 낳았다는 소식에 서울에서 창원까지 한달음에 오셨다고 한다.
(나를 예뻐하면 뭘 하나, 우리 엄마는 혼자 진통 겪으며 혼자 병원에 가고 혼자 나를 낳았는데.)
할머니는 유독 우리 가족을 만날 때마다 식욕이 없다 하셨다.
우리는 할머니 근처에 살았던 적이 없었고, 고모랑 삼촌이 할머니 근처에 산다.
딸자식네 집은 사위 눈치 보이니 자주 못 가고, 작은엄마랑 사촌동생만 있는 작은 아들네 집을 그리도 자주 쳐들어가셨다.
아들이 일하러 가고 없는 그 집에서 할머니는, 온갖 패악질을 다 부렸다.
서랍을 뒤져서 수저세트 같은 살림살이를 가져가고, 밥 차려내라 작은엄마를 들들 볶아서는 항상 고봉밥을 잡숫고.
그런 할머니는 명절 때 우리 집에 오면 항상 식욕이 없어졌다.
아무리 고기반찬이니 뭐니 차려내도 반공기도 채 먹지 않고는 입맛이 없다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작은엄마네 집에 쳐들어가서 패악질 부리고 고봉밥으로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건, 어느 해인가 명절을 쇠고 난 직후였다.
할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할 때면 항상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다.
우리는 돼지갈비가 먹고 싶지 않아도 꾸역꾸역 먹어야만 했다.
먹고 나면 왠종일 속이 더부룩 하고, 옷에 음식 냄새가 배는 돼지갈비만 먹는 게 싫었다.
그런데 할머니한테는 돼지갈비가 최고의 외식 메뉴였고, 돼지갈비 이외의 다른 음식은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엄마는 할머니가 하도 어렵게 살아서 그런 거라고, 불쌍한 노인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면서도 늙은이가 외면받지 않으려면 나이들수록 이래저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한다.
자식들이 뭘 먹으러 가자고 하든 군말없이 알았다고 하시는 외할머니와 항상 비교하셨다. 저러면 얻어먹을 밥도 못 얻어먹는다고.
사실 할머니를 뵌 지 참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명절이 되면 동생들이랑 아빠만 차례지내러 서울에 간다.
이제 와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을 듣고서 할머니 인생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빠가 어버이날인 오늘,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일방적으로 토요일인 어제 저녁으로 시간을 바꿔버렸다.
언제나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인 아빠가 몸서리치게 싫어서, 나는 꼭 나오라는 아빠 카톡을 무시했다.
무시하다가 2시간쯤 전에 답장을 했다. 오늘은 동생들이랑 먹으라고. 그 동안 동생들 못보고 나랑 먹었으니 오늘은 나 없어도 되지 않냐고.
그랬더니 오늘 할머니가 오신단다.
그러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이제 와서 말하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어차피 할머니는 동생이랑만 연락하니까 동생이랑 먹으라고 했다.
그러고 9시쯤 귀가하니 거실에 덩그라니 놓인 20키로짜리 과일 박스. 그 안에는 검정 봉다리며 파란 봉다리가 그득 쌓여 있었다.
병원 검진 때문에 이모댁에 올라와 계신 외할머니를 뵈러 갔던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 그걸 풀어보며 우셨다.
자식 잘못 낳아서 70 넘은 노인네가 이 무거운 걸 제기동서부터 일산까지 끌고 왔다고. 불쌍한 인생이라고.
그 울음에는 할머니 인생에 대한 연민과, 자기도 그런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