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역VS의역= 가독성과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고루 갖춘 의역
수년 전, 그러니까 대학 졸업유예를 했다가 겨우 졸업하기로 결정하고, 지난번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의 시기에 출판번역가를 꿈꾸던 내가 있었다. 문장은 잘 쓰지만 창의성은 떨어지는 나에게 출판 번역은 꽤나 매력적이고 적성에 맞는 작업이었는데, 직업으로 삼기에는 보상이 너무 적었다. 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일감이 끊이지 않는 탑급 출판번역가 연봉이 5천만 원 정도라나. 5년 전 정보니까 그보다는 약간 올랐을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박봉일 것이다. 온전히 사람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사는 직업은 연봉이 높아질 수 없으니까.
오늘 새로 온 노트북을 세팅하면서 정말 몇 년 만에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그때 그 시절 작성했던 글을 발견했다. 나는 항상 책을 읽으면서 내용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함께 평가하는 인간이었고, 문장이 조악하면 아무리 유명한 책이어도 읽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뱉어내는 문장들도 항상 섹시해야 (=눈길을 사로잡고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주의인데, 몇 년 만에 다시 읽은 내 문장은 꽤나 잘 쓴 문장인 것 같다. 출판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점을 빼면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현재의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조악한 번역을 싫어하는 현상은 더욱더 심해져서,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영어와 일본어는 웬만하면 원서로 읽는다. 물론 원서로 읽으면서도 문장력을 나노평가하는 버릇은 버리지 못하지만.
(2016/5/19 작성)
나는 독자다. 앞으로 번역으로 먹고살든 아니면 내 이름을 걸고 책을 쓰든, 내가 책을 읽고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문장을 써 내려갈 때 독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간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자와 번역가에게 얼마나 많은 불만을 품었던가. 조악한 문장이 가득한 책을 내놓은 저자에게는 "한국인이 글을 이따위로 써?", 번역투가 난무해서 한 페이지도 채 읽기 힘든 번역서를 읽고는 "번역을 이따위로 할 거면 하질 말지.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낫겠네." 하며 비난하기 일쑤였다.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내가 직접 번역으로 먹고살아보려고 이 세계에 뛰어들고 나서야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감한다. 내가 직접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겠지- 하고 막연히 얕잡아 봤던 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독자인 나는 문학작품을 읽을 땐 작가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 원문을 곧이곧대로 활자 번역 한 텍스트를 읽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민음사에서 출간하는 세계문학 시리즈를 너무나도 싫어한다. 올드하고 축축 처지는 문장. 때로는 한 장도 넘기기 버거운, 읽고 있노라면 원문이 어떻게 쓰였는지 빤히 보이는 번역투의 향연. 반대로 가장 좋아하는 세계문학 출판사는 열린책들이다. 열린책들에서 펴내는 책들은 어떤 것을 고르든지 번역 퀄리티가 보장된다. 깔끔하고 가독성 높은 문장, 길지도 짧지도 않게 적재적소에서 치고 빠지는 역주까지. 읽을 때마다 ‘그래, 자고로 문학은 이렇게 번역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가독성과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고루 갖춤.’ 열린책들 버전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평가다. 내가 번역된 문학작품을 읽을 때 기대하는 ‘작가의 숨결’은 바로 가독성과 충실성을 겸비하는 것이다.
교양서적이나 전공 관련 서적을 읽을 땐 제발 간결하고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쓰인 글을 읽고 싶다. 국적 불문하고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한국어인지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외계어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 글을 써내곤 한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써놓은 논문과 책들을 과제 때문에 꾸역꾸역 읽어야만 했을 때, "나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더랬다. 내가 존경하는 모 교수님께서는 ‘글이란 자고로 이렇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고 논리 정연해야 한다’ 하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글을 쓰셨다. (그분은 1,000 페이지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돌베개' 같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문 하나 없이 쓰신다. 편집자의 공이라고 보기엔 논문도 모두 그렇다.) 비문과 번역투로 가득한 글을 읽으며 괴로워할 때 그분은, "너네 정도 되는 애들이 읽어서 이해 못 하는 책이면 글 쓴 사람이 문제야. 영어도 마찬가지야. 유명한 사람이라고 다 글 잘 쓰는 거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공부하면서 내용에만 치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엉망진창으로 쓰인 문장과 씨름하고 싶지는 않다. 독자로서 이런 부분에 항상 짜증 냈던 나는, 번역가가 되어 독자들이 번역서를 읽으며 짜증 내는 시간을 줄여주고 싶다. 독자가 번역 때문에 골머리 앓지 않고 책을 책 그대로 즐겼으면 좋겠다.
번역가는 한 언어로 쓰인 글을 다른 언어로 다시 쓰는 사람이다. 혹자는 번역을 반역이라 하기도 하고, 재창조라고 하기도 한다. 원작이 악보라면 번역은 연주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번역 작업이 ‘레고 조립’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에도 성 레고를 분해해서 경복궁 레고로 만들기도 하고 도쿄타워 레고를 분해해서 서울타워를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래 있던 블록을 임의로 없애거나 원래 없던 블록을 멋대로 추가해서는 안 되는, 그런 레고 조립 게임이 바로 번역이 아닐까. 문학이든 전문 서적이든 마찬가지다. 원작자가 쓴 문장 속에 존재하는 요소와 내용, 뉘앙스를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답시고 쓸데없이 살을 붙인다거나 역주를 덕지덕지 바르는 짓도,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고 뭉텅 잘라버리는 짓도 해서는 안 된다. 분해한 블록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보면서 완벽에 가까운 조합을 찾는다. 100%에 가까운 충실성과 한국인이라면 누가 읽어도 이해할 만한 가독성을 고루 갖춰야 마땅하다.
그러려면 문장이 깔끔해야 한다. 깔끔하고 말고는 문장의 길이에 달려 있지 않다. 작가가 만연체로 줄줄 써내려 나간 글이건,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긴장감 있고 쫄깃하게 써내려 나간 글이건 번역가는 그 문체를 살리되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만연체라고 해서 가독성이 떨어지고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고 해서 가독성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가독성은 글 쓰는 사람의 필력과 모국어 실력에 따라 결정된다. 원저자의 글 실력은 이미 판가름 난 문제이니, 그 결과물을 한국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가의 필력과 모국어(=한국어) 실력이 관건인 셈이다.
흔히들 번역가의 필력이 중요한 분야는 문학이라고 한다. 비문학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니 번역가가 얼마나 문장력이 좋은지는 별로 상관없다고. 과연 그럴까? 아니다. 비문학도 문학만큼이나 저자와 번역가의 필력이 중요한 장르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려고 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하는 바이블과도 같은 책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대부분 번역 퀄리티가 매우 떨어진다. 내가 공부한 사학을 예로 들자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계번역이 난무해서 읽기 싫고 이해도 되지 않고 차라리 원서를 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니 번역서로는 최악의 결과물이다. ‘전문성’만 외쳐대며 교수에게 번역을 맡긴 결과는 처참하다.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가독성 좋은 번역문을 뽑아낼 수 있는 번역가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번역서에서 번역가가 돋보이는 것도 썩 좋지는 않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번역가는 참으로 애매한 지위를 차지한다. 번역문은 번역가의 창작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번역가는 표지에 이름 한 줄 들어갈 뿐 아니던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공기처럼 독자들 곁에 머무는 것이 바로 번역가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동안에는 번역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지만,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서 “이 책 번역 참 잘했네.”라고 생각할 정도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