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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Jul 25. 2019

경희궁의 모퉁이

쓸쓸해도 존엄을 잃지 않아

솔비야,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너의 이름을 부르며 네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바로 지금과 같은 과거의 수많은 순간들처럼 내 마음을 꺼내어보려 해. 네가 언제나 귀 기울여 들어줄 거라고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우리는 집 밖 여행자니까 집을 나서면 바로 닿는 곳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 


집 근처에 궁이 하나 있어. 이게 사대문 안에 사는 기쁨일까. 자세히 살피면 사대문 안은 아니고 근처지만. 서대문에서 경복궁과 가까운 쪽이 아니라 먼 쪽에 있는 집이거든. 덕분에 궁이 가까이 있어. 그리고 그건 내게 아주 큰 기쁨이야. 궁은 내 마음이 마음 놓고 풀어지는 곳이라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할 때 찾는 나만의 힐링 스팟이거든.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창경궁을 즐겨 찾았는데 이제 나의 궁은 경희궁이 되었어.

응, 그래, 경희궁. 이 동네에는 돈의문 터가 있어. 동대문은 흥인지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대문은 숙정문, 그리고 서대문이 바로 돈의문이야. 돈의문은 사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복원이 안 된 탓에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 그 옆에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있는데 여러 채의 한옥과 그 안의 예술전시 등이 있으니까 서울의 옛 모습을 보고 싶다면 산책 삼아 한 번쯤 둘러보아도 좋을 거야. 박물관 마을을 나오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경희궁을 볼 수 있어.


경희궁을 처음 마주하면 조금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어. '으응? 이런 곳에 갑자기 궁이?'랄까. 큰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 옆으로 쑤욱 들어간 곳에 뜻밖에 궁이 서 있거든. 경복궁이나 창덕궁, 덕수궁 근처에는 '이곳에 궁이 있다'라는 예고가 분명하게 있잖아. 궁의 벽이 보인다거나 고층 건물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인다거나 길에 가로수가 아닌 나무들이 빽빽하게 보인다거나. 그런데 경희궁은 도로를 따라 걷다가 조금 삭막하다 싶을 즈음 문득 고개를 돌리면 궁의 문이 보이는 거야. 그게 경희궁의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를 만드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나는 그 쓸쓸함을 좋아해. 경희궁 입장에서는 슬픈 일일까? 제자리가 아닌 것 같은 장소에 어색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야. 궁의 입장 같은 것 알지 못하는 나는 집 근처에 이렇게라도 궁이 있으니 좋다고 간편하게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경희궁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조금 번잡한 느낌이 들어. 뭐가 많은 건 아닌데 괜히 어수선하단 말이지. 오른쪽으로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고 왼쪽으로는 경찰박물관의 뒤쪽과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언제 가든 이곳에는 활기가 없달까. 어수선과 활기 없음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특성이 섞여 있는 것만큼이나 아무래도 우중충한 입구야.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는 길이 좁지도 않은데 뭔가 뒷골목 같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렇지만 그런 입구라 궁 안이 궁 밖의 현실과 단절된 느낌을 줘. 천천히 걸어 문을 통과하면 궁의 밖과 안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느낌이 좋아. 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다른 세계에 도착하는 기분이거든.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이라는 이름을 가졌어. 한자로 오른쪽에서부터 읽도록 쓰여 있어. 이 문이 쓸쓸하게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아. 흥화문은 일제강점기에 박문사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로 옮겨졌다가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쓰이는 등 50년 넘게 떠돌아다녔다고 해. 결국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 자리도 원래 자리가 아니라 궁이 축소되고 축소되면서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야. 그럼에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잃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어. 이렇게 오래된 건축물을 마주하면 으레 그렇듯이 나는 흥화문을 올려다보며 생각해. 이 문은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들었을까. 그 세월은 어땠을까. 달라지는 시대의 흐름을 흥화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사물에 서린 정기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풍파를 맞고도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마주하면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감정이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어. 그게 가끔은 눈앞의 존재와 관련 없는 혼자만의 자유로운 감상일지라도.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에 경희궁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궁 안에 미술관이 있었어.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이었는데 몇 년 전에 경희궁을 복원하기 위해 철거되었어. 본래 경희궁은 백 여채가 넘는 건물에 문도 동서남북으로 네 개나 있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큰 궁궐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가장 심하게 파손되었다고 해. 서울시에서는 경희궁 전체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래서 근처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미술관도 없앤 건데 그 이후에 복원계획이 엎어진 거야. 과거의 비운만큼이나 현재에도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궁이지.


흥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흙길 위 정면에 또 다른 문이 보여. 가장 큰 건물을 지키는 문으로, 숭정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발을 디딘 첫 소감은 궁이라기보다 산책로에 가까워 보인달까. 실제로 경희궁에는 항상 몇몇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반려동물과 함께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쉬는 모습도 보여. 확실히 경희궁을 보러 왔다가 쉬는 것이라기보다는 쉬기 위해 경희궁에 왔다는 인상이야. 그리고 그건 내 경우에도 대체로 마찬가지인데 내가 경희궁을 찾을 때는 쉬고 싶을 때거든. 한가로운 기분을 즐기고 싶을 때 말이야. 복잡한 도시 풍경도 싫고 쉼 없이 들리는 차 소리도 지겹고 사람들 속에 파묻히는 것도 내키지 않을 때. 집에 들어가는 길에, 볼일 보러 나가는 길에, 어쩌다가 그냥 문득 들르고 싶은 곳이야. 그곳에는 오직 한가로움만 있어. 경복궁처럼 사시사철 사람이 많지도 않고 창덕궁처럼 넓지도 않아. 경희궁 산책은 금방 끝나. 두어 개의 건물을 감싸고 흙길을 한 바퀴 휘 돌고 나면 아마 걸음이 느린 사람이라도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을 거야. 

길을 따라 직진하다가 숭정문의 오른쪽 바깥으로 크게 돌아가면 아주 큰 나무가 있어. 나는 이 나무를 좋아해. 나무를 바라보는 것도 좋고 나무에서 경희궁을 바라보는 경치도 좋아. 나무 뒤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서 나무와 경희궁을 한눈에 바라보는 건 더더욱 좋고.

그리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가질 차례야. 드디어 메인 건물로 가. 그러니까 아까 보았던 숭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신하들이 서는 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숭정전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는데 왕이 신하들과 같이 집무를 보던 공간, 우리가 궁에서 자주 보던 그런 곳이야. 가끔 관광을 온 무리가 숭정전 안을 들여다보곤 해. 아무래도 궁의 중심,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지. 특별할 건 없어도 안 보기는 아쉬운 것. 관광객 어깨 너머로 슬쩍 들여다보고 곧장 나는 숭정전의 왼편으로 돌아가. 그곳에 내가 발견한 나만의 명당이 있거든.


숭정전을 앞에서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편이야. 왼쪽 모퉁이쯤에 나는 털썩 앉아. 돌이라 그리 편안하지는 않아도 한 시간쯤 앉아있기에는 무리가 없어. 그 자리에서는 궁 밖의 다른 건물들이 잘 보이지 않아. 보이는 거라곤 하늘, 구름, 나무, 그리고 궁 안의 벽이라든지 문이라든지 하는 고풍스러운 건축물뿐이야. 비록 제대로 된 건물이 두어 개 뿐인 작은 궁이어도 궁은 궁이라 엄연히 궁의 기운이 존재해. 머릿속으로 경희궁을 떠올릴 때면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막상 궁의 한복판에 앉아있노라면 쓸쓸함은 느낄 새가 없어. 경희궁의 정갈한 존엄이 분명하게 나를 휘감아. 일상의 번잡함에서 잠시 빠져나와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갖기에 그만한 곳이 없어. 거기 앉아 음악을 들어도 좋고 공상에 잠겨도 좋고 흘러가는 구름 모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평화롭다는 말이 완전해지는 곳. 이 궁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가질 수 있는 시간일 거야. 한가로이 거니는 두엇의 무리는 나의 모퉁이 휴식에 방해가 된다기보다 외로움을 덜어주는 뭉근한 따뜻함이랄까. 나는 늘 혼자 갔지만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겠지. 언젠가 너와 함께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한 잔씩 들고 경희궁을 산책하는 상상을 해 봐. 그땐 나의 모퉁이를 소개해줄게. 내가 좋아하는 그 경치를 바라보며 너와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다 보면 어느 순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날 힘이 생겨. 이제 좀 괜찮겠다 싶은 순간이랄까. 나가는 길에는 숭정전의 뒤쪽으로 돌며 작은 건물을 구경해. 다시 빙 돌아 걸어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 사소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것만 같아. 그저 곁에 잠시 앉아있었을 뿐인데 나는 궁에게 뭔가를 고맙게 받은 것 마냥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 고마워. 잘 있어. 또 올게. 흙길을 밟으며 흥화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금세 현실로 돌아갈 테지만 궁 안에 있던 시간만큼은 아주 충실한 순간들이었어. 나를 변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좋은 건 나를 몰입하게 하는 것. 과거와 미래를 후회와 불안으로 둥둥 떠다니는 나를 현재로 잡아끄는 것, 내가 나로 있게 만드는 것,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순간에 충실한 순간들이 그 자체로 완전한 행복이야. 이 동네를 떠나더라도 경희궁은 오래 잊지 않을 거야. 자그마한 궁이, 어딘가 어설프게 서 있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쭈뼛거리는 나를 보는 것 같은 이 궁이, 무엇보다 편안한 휴식을 주어. 경희궁의 쓸쓸함은 언제나 나와 공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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