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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Jul 30. 2019

너의 도쿄 1

그 날은 바람이 불었고, 비가 굵었다 가늘었다 했어.

솔비야,


너를 이렇게 부르며 편지를 시작할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야. 너에게 편지를 쓰고 너의 편지를 읽는 시간은 언제나 그래.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비가 와. 창밖의 빗소리, 아스팔트에 고인 빗물을 가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비 오는 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야)를 듣고 있으니 너의 도쿄가 떠오른다. 도쿄에서 너를 만난 날, 바람이 불었고, 비가 굵었다 가늘었다 했어. 마중 나온 너와 비를 가르며 걸어 도착한 너의 집. 흠뻑 젖어버린 옷을 털며 너는 우산 쓴 보람이 없다고 웃었어. 네가 빨랫줄에 널어둔 내 젖은 양말이 완전히 마르는 동안 우린 마주 앉아 차를 마셨지. 너와 보낸 그 촉촉한 시간을 버석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종종 떠올리게 될 거야.  


도쿄에서 너의 공간을 방문하는 건 그때가 두 번째였지. 십 년 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일본에 갔고, 너의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잤던가, 아니 이틀 밤이었나. 첫 도쿄 여행은 대체로 기억이 희미한데, 너의 공간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어. 사진이 남겨져있는 덕분일지도 모르고(네가 만든 요리를 먹고 침대에 나란히 앉아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어), 그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가끔씩 그곳을 떠올렸어. 너의 정갈한 공간. 모든 물건이 마땅한 자기 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듯한 방. 내 키만 한 긴 창문으로 들어오던 도쿄의 바람. 그 공간을 생각할 때면 내 마음에도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아.


그 사이 우리에겐 많은 게 달라졌다. 사회에서 말하는 생애주기에 따른 과업들을 수행하기도 하면서 말야.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건 여전히 너는 도쿄에, 나는 서울에 살고 있는 점.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싶고, 또 받고 싶다는 점이겠지.


솔비야,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부야역에서 한 번 갈아탄 뒤 너의 동네로 향하는 길은 말야. 내게 여행 속의 여행 같기도 하면서, 이미 도쿄를 7일째 경험하고 있는 여행자로서 도쿄 지하철이 이제 서울 지하철처럼 느껴지는, 좀 이른 익숙함이기도 했어. 그다음 날, 유라쿠초역에서 환승할 출구를 잘못 찾아 역무원에게 "시나가와역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영어로 떠듬떠듬 물어본 걸 보면, 실제로 나는 꽤나 이른 익숙함을 느낀 셈이었지. 대부분의 일본인, 특히 서비스업이나 지하철역 안내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분명 친절할 거라는 기대를 깨고 유라쿠초역의 그 역무원은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넘버 쓰리."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어. 그렇지만 9일간의 여행 중에 불친절한 사람을 만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기보단 경향성의 예외로 치려고 해.


네가 말해준 역에 내려서 너와 만나기로 한 출구를 확인한 후, 나는 좀 헤맸는데, 꽃집을 찾기 위해서였어. 전날 구글 지도를 보니 역 근처에 꽃집이 있었거든. 안 그래도 너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나에게 일본이란 모든 좋은 게 모여있는 곳이고. 거기 사는 네게 과연 무엇을 선물하는 게 좋을지 궁리하다가 그래, 아무래도 꽃이 좋겠다 생각하던 참이었어. 막상 역에 내리니 지도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찾기 어려워 한참 지도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찾아간 아오야마 플라워 마켓이란 꽃집은 참 멋지더라. 조금 어두운 색깔의 인테리어에 대비되는 화려한 꽃들, 깔끔하고 정갈한 매장. 후에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이름의 체인을 몇 군데 만났는데 괜스레 반가웠어. 꽃을 고르는 일은 입안에서 달달한 사탕을 굴리는 즐거움을 닮았는데, 그곳은 완벽한 사탕 가게였지. 꽃 선물을 떠올리며 하나 염려한 게 꽃을 손에 들고 있으면 널 만나자마자 주게 될 거고, 그럼 이동하면서 네가 들기 번거롭지 않을까 였거든. 역시 일본은 소소한 욕구까지 세심하게 채워주는 곳이더라. 크기가 꼭 알맞은 손잡이 달린 봉투에 꽃을 조심스레 넣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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