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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레트번역가 Sep 17. 2018

우정에 나이 따위

  토요일 오후, 유치원생이었던 아이 손을 잡고 공원에서 열린 벼룩시장을 돌고 있다가 돗자리에 아이돌 스티커를 잔뜩 펴놓고 팔고 있던 그 애를 만났다. 안경을 쓴 맑은 얼굴은 학생인 것이 분명한데 말투와 수완은 좌판 장사 한 10년 한 사람 같았다. 그 아이가 흥미로워 돗자리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몇 마디 말을 시켰고 그 아이는 아직 순진한 소녀답게 타인의 관심을 넙죽 받아주었다. 그렇게 새로운 동네, 새로운 이웃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외로운 삼십 대 중반의 애 엄마와 덕질을 수익과 연결시킨 여고 3학년생은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한 달 정도 나는 의외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날을 보냈는데 이 학생이 밤낮 안 가리고 문자로 동방신기 추천곡을 보내주는가 하면 집 앞까지 와서 자기가 무척이나 아끼는 사진집들을 일주일만 보고 꼭 돌려주라며 빌려주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동네 일식집에서 돈가스를 한번 같이 먹었고(당연히 사줬고) 나는 이 친구가 공부와 대학에는 관심 없어 엄마에게 매일 혼난다는 이야기, 어디 공원에서 스티커가 잘 팔리는지에 관한 이야기, 연말의 여고 교실 풍경 등을 전해 들었다.  얼마 안 가서 나의 동방신기에 대한 잠깐의 애정도, 여고 친구와의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가끔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어디선가 장사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나의 사람 사귀는 스타일을 말해주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몇 년 후에 다닌 소설 쓰기 수업에서 가장 친해진 사람은 20대 중반의 미술 학원 선생님이었다. 서로의 글을 유난히 좋아했고 그러다 보니 사람 자체에도 호기심을 느끼고 모임에서도 눈빛을 교환하다가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갔어도 따로 만나는 사이가 된 것이다.

20대 예술가의 예민함을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지 못해 그 관계는 몇 년 정도 이어지다 깨지고 말았으나 그 이후로도 나는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았어도 20대, 30대 싱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가 적지 않았다.

꼰대스럽지 않은, 아줌마 티 나지 않은 쿨한 기혼녀 언니가 지혜로운 말을 곁들여 고민 상담을 해주고, 나갈 때 되면 카드를 척 꺼내 드는데 왜 만나기 싫어하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합정이나 이태원에서 이 친구들의 패션과 언어와 생활과 정신세계를 흡뻑 흡수하고 온 날이면 나는 한껏 젊어진 기분이 되어 나는 나와 비슷한 나이 때의 저 엄마와는 다르다, 특별하다는 자기도취에 빠져들기도 했다.

미국 영어도 영국 영어도 아니나 양쪽에서 다 받아들여지는 mid-atlantic 영어를 쓰는 사람처럼 나는 인생 경험도 있지만 여전히 젊고 톡톡 튀는 언어와 감성을 유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욕심을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1월 나의 의지력을 믿지 못해 두 가지를 일시불로 질렀는데 하나는 동네 그림 동아리와 다른 하나는 일 년 치 피트니스 센터 이용권이었다.  

그림 동아리에서도 두 번째로 어렸고 또 헬스클럽 사우나라는 신세계를 만나면서 올해 내가 가장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나보다 대략 15세에게 20세는 많은 분들이 되었는데, 아! 나는 이분들과의 교류에서 진정한 사람 사귐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아빠와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은 것처럼, 이모가 친구로 보이는 것처럼, 나이차에 대한 감각은 옅어지는 것 같다. 또한 젊은 지인들 만날 때와는 달리 애써 내 나이에 비해 트렌디한 척 필요 없이 동네 생선 가게와 등산 코스 정보를 교환할 때면 은근한 해방감마저 맛보았다. 또한 이 여사님들의, 알고 보면 전혀 자기 비하적이지 자기 비하와 생활 기반 유머가 이렇게 웃길 줄도 몰랐다.     

 

어쩌면 마침 내가 나이에 비해 젊고 감각적이어야 한다는 집착을 드디어 벗어버린 시기와도 겹쳤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부러 문화생활이나 번역 이야기 등을 주로 올리고 내 나이를 굳이 드러내기 싫었던 트위터에도 중학생 아이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을 전보다 자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쓸 때도 조금 더 젊은 층들에게 어필하고 싶다거나 타깃 연령층을 의식하며 쓴 글보다 나의 재미없고 구차한 주부 생활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인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 나이를 그대로 표 낼 때 더 진솔하고 매력적인 글이 나왔다. 내 말투건 패션이건 생각이건 내 나이로 보이는 것이 마땅하고 그러면 뭐 좀 어때?라고 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편안한 사람이 되어가는 듯했다.


주말에 동네 축제 재즈 공연을 갔다가 같은 동네 사는 트친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남편분과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머니와 함께여서 "어머니 오셨네요." 인사하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고 축제에 가서 막걸리까지 한잔씩 하게 되었는데, 이 어머니가 내가 지극히 사랑하며 가을마다 찾는 은행잎 거리를 늘 찾으시고, 몇 년 간 나처럼 동네 축제를 혼자라도 꼭 왔으며 나처럼 혼자 장미여관 공연도 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술을 전공하신,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수수한 외모지만 눈빛은 호기심과 생기가 넘치는 분. 내가 요즘 만나는 어머니들과 비슷한 연륜과 여유가 있으면서도 내가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 넘치는 대화까지 가능할 것 같은 이 분!  

나 아무래도 트친의 어머니에게 반한 것 같은데 어떻게 또다시 만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 분과 가을 낙엽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우리 동네의 역사와 예술가들 뒷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얼마나 낭만적인 하루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한번 더 뵙고 전화번호까지 받을 수 있을까?  

사랑에도 나이 성별 국경이 없는데 우정에 나이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업실에 오고 있는데 같은 단지에 사는 그림 모임 회원분을 만났다. 연락했는데 왜 집에 들르지 않았냐면서 만나면 모시 송편을 주려고 했다고 했다.  

오호라, 나이 드신 분들과 친구 먹으면 이런 장점도 있구나. 내가 지갑을 열지 않아도 얻어먹을 게 많다는 것. 모시송편, 흠...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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