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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레트번역가 Oct 12. 2018

중년의 오후

3시 반에 치과 예약이라 3시쯤 작업실을 나온다. 버스가 한가하다. 돈을 내지 않고 탄 할머니에게 기사가 성을 내고 할머니는 미안한 듯 어깨를 움츠린다. 내가 내주면 좋겠는데 1000원짜리가 없다. 내주는 것도 이상하려나. 집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5분 정도 남았길래 집에 들어와 이를 닦고 간다. 의사와 간호사에 대한 예의지. 치실도 한다. 안 했으면 큰 일 날 뻔했네.

치과 의사는 친절하고 목소리가 조심스럽고 예쁘다. 내성적인 부잣집 둘째 아들이었을 것 같다. "조금 시리실 거예요." "바람 한번 쐴게요." 이는 조금도 시리지 않는다. 내 통장 잔고가 시리겠지. 아니다. 이번에는 진단서를 남편 회사에 내서 진료비를 환급받을 예정이다. 이럴 때면 결혼 생활의 피로가 3프로 정도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영수증과 함께 진단서를 스테이플러로 찍어 남편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놓는다.  

신경 정신과에 간다. 신경 정신과 대기실 풍경도 몇 년 사이 많이 변했다. 중병을 모시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걸까 싶게 지친 인상의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 중년 부부가 와서 주말에 뭐할지를 가볍게 의논하면서 기다리기도 하고, 장난꾸러기 아들과 목소리가 통통 튀는 엄마가 사람 많으니 커피숍 다녀오겠다며 나간다. 친구와 같이 와서 수다를 떨고 있기도 하고, 반항하는 딸이 엄마에게 "내버려 두라고." 했어도 서로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기도 한다. 이비인후과나 피부과와 별 차이 없잖아.

의사 선생님은 근래 나의 상태가 좋아져서 약의 용량을 줄여준다고 한다. 보통 걸음으로 걷다가 크게 한 걸음 내딛은 기분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약국에 들른다. 남편이 아침마다 먹고 있는 영양제가 한 알 밖에 없다는 걸 오늘 아침 발견했다. 내 약과 함께 영양제를 달라고 한다. 요령 있게 깎아 본다. 자주 올게요. 다른 손님들한테 비밀로 할까요? 헤헷.   

학원비 내라는 문자가 왔기에 아이 학원에 들러 학원비를 낸다. 카드를 받아 들고 감사합니다. 인사한다. 지금까지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생각한다. 치과 의사에게 두 번, 데스크 직원에게 한번, 신경 정신과 의사에서 한 번, 데스크 직원에게 또 한번, 약국에서 한 번, 학원에서 한 번, 내 돈 쓰면서도 감사하다, 감사하다, 참 많이 했네. 그런가 보지 뭐.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은 초록 옷을 입은 나무 사이로 하늘이 파랗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이미연 나오는 청소년 영화가 있지 않았나? 파란 하늘을 보면서 기껏 이런 고리짝 시절 영화 제목을 생각하는 내가 너무 노땅 오브 노땅 같아 싫다. 그런데 그다음 생각나는 것이 혜은이의 파란나라다. 난 찌루찌루에. 그만 하자.

집에 오면서 고양이를 본다면 오후의 완벽한 마무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양이들이 잘 먹는 습식 사료를 살 것이다. 습식 사료와 함께 내가 채워 놓아야 할 살림 목록들을 떠올리다 마트를 떠올리고, 아이와 오늘 저녁에 노래방에 갔다가 그 앞 마트에서 하겐다즈 한 통을 사 오자고 했던 계획을 떠올린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멋지게 뽑고 나훈아의 갈무리를 구성지게 부를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 맥나잇의 One last cry를 K팝 스타 시즌 4의 김윤하처럼 청초하게 부를 것이다. 과연?

집에 오는 길 내가 평소에 예뻐하는 동네 고양이 레오가 있다. 나를 두 번 뒤돌아보고 야옹야옹 두 번 운 다음 우아한 자태로 천천히 아파트 계단을 올라간다. 햇살은 아직 동그랗고 뽀얗다.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이야기를 나눈다. 문득 지금의 내 나이가 지금 이 계절, 이 시간 오후 네 시 정도일 거라 생각한다. 이 정도로만 쾌청하고 평온했으면 좋겠다. 내가 애끓이며 노력하지 않아도.   

아파트로 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보니 시간은 네시가 아니라 다섯 시다. 쳇. 이건 내 나이가 내 인생의 오후 네 시가 아니라 다섯 시라는 이야긴가.  네 시도 양보한 건데. 다섯 시라니. 그래도 자정까지는 일곱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아파트 문 옆에 사과 한 상자가 배달 와 있다. 급하게 상자를 열어서 사과 하나를 깎아 먹는다. 아삭아삭 소리가 조용한 집에 크게 울린다. 농부 아저씨가 손으로 쓴, '전화 받자 마자 딷습니다.' 라는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사진을 찍어 놓는다. 유튜브를 보면서 어제 먹다 남은 전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나는 대충 때웠지만 저녁은 해야 되겠지? 냉장고 속을 스캔한다.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남편이 들어온다는 문자가 왔다. 아이도 곧 올 시간이다. 일어나 아침에 개다 만 빨래 정리해야지.

나는 브라이언 맥나잇의 One last cry를 듣는다. 예습 차원에서.

아니면 오늘은, 제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 점잖게 저물고 있는 10월의 저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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