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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육에 대한 생각

더 많은 통합학급이 생겨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1. 저녁 7시 30분. 휴대폰 메시지로 줌 주소가 하나 왔다. 최** 선생님의 공부모임이다. 또 줌이냐는 가족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많은 선생님들이 모여 계셨다. 선생님들은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라는 책을 읽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계셨다.


2. 조현병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들. 그에 대한 다양한 뇌과학 도서들 속 이야기들. 학교 현장에서 마주하는 특수아동에 대한 교사로서의 고민과 도전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 누가 하라고 하는 공부가 아님에도 열정적으로 노력하시는 모습을 뵙는 것만으로 마음속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3.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편으로 통합교육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몇 자 끄적여 본다. 오로지 흩어져 있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4. 


1) 통합학급을 맡는 것을 반기는 교사보다 꺼리는 교사가 많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사한 아이를 만난 경험이 매우 적다. 대부분 처음인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엔 지적장애, 발달장애(불특정 한 전반적 발달장애 포함 2명), 중증 자폐, 아스퍼거(자폐 스펙트럼 장애), 배변장애, ADHD, 틱, 뚜렛, 소아 우울, 청각장애 아동을 만났다. 이중 가장 자주 만난 건 지적 장애인데 최근 들어서 가족성 지적장애로 의심되는 아동을 만난 적이 있다. 물론 학습장애로 의심되는 아이들도 만났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학급에서 언제나 소수였다.


2) 중증 자폐 아동은 지적 장애와 중복 장애를 갖고 있었고 나는 2년 차 신규 교사였다. 수업 시간 내내 특정한 노래의 같은 소절만 반복해서 조용히 불렀고, 노래를 듣는 아이는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특수 학급은커녕 특수교사도 없는 학교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책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책을 고를 안목도, 책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3) 공부를 한들 다음 해에 같은 아이를 맡는 것도 아니었다. 일반 아동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서 허덕이던 내가 특수 아동을 맡는다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이야기할수록 아이들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교육적으로, 발달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모르니까 불안했고, 불안해서 피하고 싶었다. 교사로서 내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4) 상담을 공부하면서 병리를 접했고, 병리를 접하니 치료로 이어졌다. 하지만 난 교사이고 여전히 다수의 아이들은 치료가 아니라 교육이 필요했다. 교육은 개입이 아니라 예방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운이 좋게도 긍정심리를 만났다. 병리에 대한 공부가 헛된 것은 아니었다. 발병의 원인에 대한 시대적 접근과  각 관점의 변화에는 일종의 맥락이 있었고, 각 맥락의 절정은 유사한 개념을 서로 다른 용어로 나타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었다. 


5) 공부를 하면서 초임 시절에 비해 특수 아동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넓어졌다. 여러 특수 아동을 만나고 함께 1년씩을 지내면서 나는 한 가지 공통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태도에 민감하지만 이 아이들은 더 민감하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그게 가족이건, 친구이건, 교사이건. 어쩌면 이 아이들이 내 교사로서의 태도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랬다.


6) 공부할수록, 아이들과 지낸 경험이 쌓여갈수록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하지 않은 만큼 아이들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세웠다. 내 손을 떠나도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님의 곁을 떠나도 자기답게 살아가는 아이가 되기를. 그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싶었다. 결국 다른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는 학급의 다른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7)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공포가 크다. 어린아이가 낯선 타인을 보고 우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인도 그렇다. 자신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타인을 접하면 피하려 든다.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하물며 아이들은 어떨까? 그래서 어떤 어른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아이들은 분리 수용해야 하지 않나? 혹은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8) 수업 시간에 큰 소리를 내는 아이가 있었다. 틱이다. 아이가 틱이라는 것을 알아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아이가 일부러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그렇다. 하물며 이를 모르는 친구나 가족, 혹은 이웃들은 아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한심한 눈으로 혹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그 모습을 보는 아이는 자기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9) 분리수용에서 삶의 질에 대한 접근으로 장애인을 대하는 정책과 교육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들 한 사람 한 삶이 한 인간으로서 자기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빛내가도록 사회가 어떻게 적정한 환경을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이러한 연구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낯선 타인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을 낮추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자신이 가진 장애와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도와가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삶이 빛나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 모두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10)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임신한 여성의 수기를 읽었다. 조현병을 가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들의 고뇌와 삶에는 여러 가지 아픔이 있었다. 둘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과연 우리 사회가 내 아이를 받아줄 수 있을까? 학교에서 만난 특수아동의 어머니들도, 특수아동으로 판정을 받으려는 부모님들도 같은 고민을 갖고 계셨다. 내 아이가 특수아동이라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놀림이나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11) 그들을 놀림이나 괴롭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가르치고 보여줄 사람이 바로 교사여야 하지 않을까? 그 모습을, 그 태도를 보고 배운 아이들이 많아져야 더 많은 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더 많은 이들이 말하고, 쓰고, 보여주어야 더 많은 이들이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더 많은 통합학급이 생겨야 하고, 더 많은 교사들이 통합교육을 위해 배우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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