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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an 12. 2022

제주에서 1800 테이블을 산다는 것

굽신굽신 제주고객

거짓말 안치고 테이블을 오백 개는 봤다. 인터넷 쇼핑몰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보고 또 봤다. 노트북과 대화도 많이 했다. 대화라기보다는 나의 일방적인 한숨과 욕이었다. 노트북은 장수 할 것이다. 처음에는 '제주도 및 도서산간지역 배송 불가'라는 말에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문구를 사백구십구 번쯤 만난 후에는 욕을 넘어선 좌절감이 찾아왔다. 


오프라인 가구매장에 가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주도는 서울과 다르다. 내가 살던 논현동에는 멋있게 잘빠진 가구들이 각자 자신을 뽐내며 '니가 나를 사는 건 어림도 없을걸'의 가격표를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 수 있든 없든 이쁘고 크고 세련된 것들은 많았다. 


제주도가 아무리 트렌디한 곳이라해도 엄연히 지방 소도시다. 수요가 많지 않은 큰 테이블을 섬까지 실어와 디스플레이를 해놓을 가구점은 없다.  브랜드 가구점의 프랜차이즈가 있지만 소재의 퀄리티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혹은 정말로 너무 좋고, 너무 비싸다. 내가 원하는건 MDF 정도이고, 원목이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가격이어야 한다. 합리적인 길은 인터넷 쇼핑몰에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가성비 좋고 갬성 터지는 가구들은 모두, 논현동의 그것들처럼 '제주도에 있는 니가 나를 사는 건 어림없을껄'이라는 식으로 '배송 제한'이 걸려있다.


오백 번 넘게 본 '너님은 안돼요' 문구
하얀 상판에 학다리 네개. 이걸 사는게 그리 어렵다니


그저 사각 라운딩으로 마감된 화이트 테이블. 내가 원하는 건 단순했다. 엄마가 30년 썼던 원목 식탁을 서제 테이블로 교체하는데 필요한, 딱 그 정도. 오백 개의 '제주배송 불가' 업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애에 가깝다. 제주라이프의 아이러니다. 나무가 정말로 많은 동네지만, 나무를 단순하게 가공한 제품 하나는 '단순하게' 살 수 없는 곳. 


얼마 전 스마트 스토어를 하는 친구에게서 '제주도로부터의 주문'이 얼마나 골치 아픈지 들었다. 판매자에게 수익이 남지도 않는 '추가 배송비'를 요구했을 때, 수많은 제주의 고객들이 얼마나 성을 냈는지도. 판매자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나는 인터넷 쇼핑을 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내적 '성'을 끊었다.


정말로 비애다. '제주도 및 도서산간지역'이라는 말은, 때로 2등 시민 같은 기분을 줄 때가 있다. 1800 테이블만의 문제가 아니다. 행거 하나를 사는데도 어떤 설명도 없는 '일방적인 구매자 취소'를 빈번히 겪었다. 가구는 보통 제품 가격의 1/3 정도를 배송비로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구뿐인가. 휴대폰 보호필름/케이스처럼 저렴한 상품은 제품 가격의 반만큼 배송비를 낸다. 유명한 모델이 광고하는 요가복을 세일기간에 주문했다가 사이즈 교환을 하는데 왕복 택배비가 옷값의 90%가 되자, 브랜드 고객담당자는 내게 오히려 구매 취소를 제안했다. 


사실 가장 서러운 부분은 홈쇼핑 먹거리 제품이다

제주도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홈쇼핑의 '먹는 제품(냉동 밀키트 제품이든 진공포장이든 할 것 없이 전부)은 그 무엇도 배송 불가. 나는 이제 홈쇼핑을 아예 보지 않는다. 빈정이 상했다는 게 가장 적절한 심정이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에게 택배비와 배송에 관한 문제는 굉장히, 매우, 지겹게 속터지는 문제다. 차라리 해외직구가 편하지.


제주에서 평생 산 사람들은 좀 다를까. 식구들에게 물어보니 체념에 가까웠다. 그러려니 해. 나에게는 아직 적응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당근'에 키워드를 넣어 보았다. 밑도끝도없이 '1800'이라는 단어. 몇 시간 후 알림이 울렸다. '1800 테이블 내놓습니다.' 아래의 문구가 정곡을 찔렀다. 제주에서 긴 테이블 구하는 거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죠? 000원입니다. 직접 가져가세요. 나와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결승선을 맛본 자의 스웩이 느껴졌다. 하지만 효도선물이라 스크래치가 난 테이블은 사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운 좋게 지구에 유일할 것 같은 딱 한 군데 업체를 알게 됐다. '제주 배송'이라는 문구에 뛰는 가슴을 잡고 전화했다. 내용은 그랬다. "제주에 있는 고객님 네가 살 수는 있는데, 지정된 픽업 장소로 트럭을 몰고 와서 제품을 직접 가져가야 해. 그리고 집에 가져가서 조립하는 거야. 가릿?" 성을 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겸손해진 나는,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업체 사장님께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제가 직접 픽업할 수 있습니다

보내 주시는 것만도 감사하죠!

배송비는 7만 원이다. 그것도 감사했다. 이케아의 반값이다. 이제 정말 되었다. 2주 정도 후면 엄마는 마침내 사각 라운딩으로 마무리된 1800 화이트 테이블을 갖게 된다. 자 그럼 이제, 트럭을 구해볼까.


구원받은 업체의 제품 이미지. 1600사이즈


제주 고향인이면서도

20년 넘게 들어버린 대도시 물은

이렇게 조금씩 빠지고 있다. 

제주에서 그저 '되는 것들'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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