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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개 Feb 26. 2023

역세권보다 공세권

누구에게나 녹색 아지트가 필요하다


어릴 적 모델하우스 구경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내 집 마련이란 야심 찬 목표가 있었던 부모님은 한때 주말이면 나와 오빠를 데리고 여러 모델하우스를 다녔었다. 엄마 아빠의 빅피처는 알 턱이 없는 오빠와 나에게 모델하우스는 일종의 ‘가짜 집 구경’ 놀이와 같았는데 여기서 내가 유독 좋아했던 액티비티(?)는 다름 아닌 아파트 조감도를 보면서 놀이터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단지 내에 놀이터가 몇 개가 있는지, 무엇보다 얼마나 ‘핫한’ 놀이기구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만약 뺑뺑이가 있다? 그 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격이다. 물론 나의 이런 기호가 집 선택에 반영이 됐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유년시절 나에겐 놀이터는 세계의 전부였다.



꼬마였던 내게 놀이터가 사는 곳을 선택하는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어떨까? 한국에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하숙생이었던 나는 미국에서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진 주거 환경에 대한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그리고 뉴욕까지 살아보면서 그동안은 몰랐던,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 포기하지 못할 나만의 기준을 발견했는데, 바로 녹지의 여부- 다시 말해 공원이다.

 



나는 언제부터 공원에 진심이 되었나


공원을 좋아하게 된 건 미국에 살게 되고 나서부터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매일 같이 공원으로 출근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엔 참 많은 공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숨겨진 Levi's Plaza를 좋아한다. 이름처럼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 오피스 앞에 있는 이 공원은 샌프란에 오래 산 사람들도 잘 몰라서 더 애착이 가는 곳이다.


자주 가던 샌프란시스코의 Levi's Plaza

'공원을 왜 좋아하느냐' 고 묻는다면 공원이란 공간이 주는 기능과 거기서 내가 얻는 감정 때문인 것 같다. 돌아보면 나에게 공원은 단순히 산책을 하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을 때 다 때려치우고 얼굴을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마냥 멍을 때릴 수 있는 곳, 코로나로 모든 가게가 닫았을 때 유일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곳, 혼자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곳, 마음이 복잡할 때 벤치에 앉아 내 안을 오롯이 들여다보던 곳, 한창 취업 준비로 힘들 때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곳, 그리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타지생활의 외로움에 남몰래 한숨 쉬고 때로는 처량하게 울기도 했던 곳. 즉 나에게 공원은 쉼터이자 아지트, 은신처,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오는 대나무 숲과 같았다.



그러므로 온 동네가 공원 천지인 뉴욕에서 물 만난 물고기가 된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뉴욕엔 무려 1700개의 공원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뭐 200개가 조금 넘는 샌프란시스코와는 숫자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다. (물론 뉴욕이 샌프란시스코보다 7배 정도 크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그러나 단순히 숫자 말고도, 뉴욕의 공원들은 그 규모부터 각 공원들이 가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사랑한 뉴욕의 공원들


먼저 현대 도시공원의 효시이자 명실공히 뉴욕의 아이콘이기도 한 Central Park (센트럴파크)는 과거 버려진 습지였던 곳을 철저한 도시 계획 아래 재조성한 곳인데, 무려 서울 여의도 공원 15배(!)에 이르는 규모답게 동물원, 정원, 배를 탈 수 있는 연못 등 볼거리 할 거리가 넘쳐난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는 센트럴파크 동쪽이 시작되는 곳, 그러니까 명품가가 즐비한 5번 애비뉴가 10분 거리였는데 바로 그 앞이 공원이라 종종 조깅을 하거나 멍을 때리러 가고는 했었다. 비록 푹푹 찌는 뉴욕의 폭염으로 피크닉은 몇 번 하지 못했지만, 운 좋게 그늘아래 앉아 저마다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틈에 섞여 신선놀음을 하고 있노라면 외로움이나 우울감 따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곤 했다. 꼭 나까지 여유로워지는 느낌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행복했다. 


자주 뛰던 센트럴파크 저수지. 이 저수지를 한 바퀴만 돌아도 1시간이 금방 간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센트럴 파크는 미국에서 제일 큰 공원이 아니었다는 것. 알고 보니 미국의 가장 큰 도시공원은 내가 살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골든 게이트 파크였다.(무료 20%나 크다고..) 왜 난 여태 몰랐을까.



한편 비교적 최근(2019)년에 완공된 The Highline(하이라인 파크)도 내가 좋아했던 공원 중 하나이다. 빌딩 사이에 공원이 파고든 선형 형태의 산책로인 이곳은 꼭 우리나라 경의선 숲의 공중 버전(?) 같다. (약간 서울로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서울로가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화물 열차가 다니던 철로가 폐쇄되자 근처 땅 주인들이 뉴욕시에 철거를 요청했는데,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철거가 무산되고 어떻게든 이 공간을 살리고자 했던 비영리 조직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line)'을 주축으로 버려진 철로 위에  꽃과 나무를 심으면서 2.2km의 산책로가 탄생했다.


빌딩 사이를 파고든 산책로, 하이라인

하이라인과 거의 1+1으로 요즘 뉴욕 주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원인 Little Island(리틀아일랜드)도 재미있는 장소였다. 수상공원 콘셉트이기도 하고 꼭 튤립을 연상시키는 기둥들이 하나의 거대한 화분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인공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선유도 공원이 자꾸 생각나기도 했다.

수중공원 리틀 아일랜드. 흐린 날씨에 찍어서 영 사진퀄리티가 좋지 않다.

하이라인과 리틀아일랜드가 특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새삥(?)이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두 공원 모두 다른 공원과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한다. 하이라인의 경우 10m 높이의 말 그대로 ‘고가 도로’에 있는 이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꼭 빌딩 숲을 산책하는 느낌이 드는데, 콘크리트 빌딩 사이와 하이라인 근처에 개발된, 내 월급으로는 감당 못할 고급 아파트를 구경하며 받는 느낌은 다른 공원엔 없는 것이다. 리틀아일랜드 역시 사방이 뚫려있어 뉴저지, 미드타운, 로어맨해튼의 다양한 뷰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또한 둘 다 벤치나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많고, 미술관이 많은 첼시지역의 명성에 걸맞게 유니크한 조형물들이 있어서 한마디로 기존 공원들과는 달리 ‘힙하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조금 복잡할 수 있다는 단점만 빼면.



그러나 정작 내가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좋아했던 나만의 공원은 맨해튼 아래 동네, 로어 맨해튼의 파이낸스 디스트릭트에 있는 엘레베이티드 에이커(Elevated Acre)였다. 굳이 번역하자면 높은 에이커*?(에이커는 영국식 야드-파운드 법에 기초한 면적 단위로 1 에이커는 1224.2평이다) 이름에 Elevated 가 붙은 이유는 이 공원이 말 그대로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볼 수 있는 ‘숨겨진 공원’이기 때문이다.


출처: Untapped New York


나는 이곳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행운이었는데, 1 acre 크기의 녹지인 이 공원은 뉴욕에서도 ‘Hidden Gem (숨은 명소)’ 혹은 ‘Secret Garden(시크릿가든)'으로 불리는 데다가 숨겨진 곳답게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0년 넘게 뉴욕에 산 내 집주인도 모르는 곳이었다) 여행 마지막에 알게 된 J는 이곳이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 먹고 간단하게 산책하는 곳인데, 관광객인 내가 알아버렸다며 깜짝 놀라 했다. 그래서 더 기뻤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은 느낌이랄까. 크진 않지만 사람이 많이 없어 쾌적하고, 무엇보다 이 공원 벤치에 앉아 보는 Brooklyn Bridge(브루클린 브리지)와 East River(이스트 강)의 뷰가 좋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냥 뷰 좋고 사람 없는 조용한 공원을 좋아하는 듯하다.




공원 형평성을 실천하는 뉴욕


뉴욕의 공원들을 마음껏 누리며 새삼 느꼈다. 집 주변에 녹지가 있다는 건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라는 걸. 도심 속 녹지공간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균형을 맞춰주고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녹지 공간과 정신적·심리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도시 녹지의 면적이 증가할수록 우울증상이 줄어들고, 심지어 비만 확률도 낮다고 한다.* 즉 회사로 따지면 녹지는 일종의 임직원의 건강과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복지인 셈이다.

*도시공원의 유형에 따른 인간의 정신생리학적(Psycho-physiological) 영향에 관한 연구(2020)



그런 의미에서 미국, 특히 뉴욕시가 공원을 대하는 태도가 나는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Park Equity Pla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주식에서 자기 자본을 의미하는 Equity가 여기서는 형평성의 의미로 쓰인다. 한 마디로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녹지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센트럴파크나 하이라인 근처에 사는 고소득층은 본인이 원하는 주거공간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저소득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는 공원과 같은 공공 공간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누구보다 공원이 필요하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공원 근처에 살 형편도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집에서 걸어서 10분 안에 공원을 갈 수 있도록 도시의 공원 비율을 늘리고, 다양한 형태의 녹지공간(풍부한 자연요소, 스마트 디자인, 놀이공간 등)을 만들어 공원 접근성의 격차를 줄인다는 것이 뉴욕시의 Park Equity Plan의 핵심이다.


모든 뉴요커가 오픈 공간과 문화자원에 접근가능하도록 만든다는 Park Equity Plan이 자세히 나와있다 (출처: onenyc.cityofnewyork.us)


뉴욕시의 이 플랜을 보며 처음으로 '이래서 뉴욕이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솔직히 좀 충격이기도 했다. 도시의 녹지가 단순히 쾌적한 환경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계층 간의 격차를 허물기 위한 연결도구로 쓰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미래지향적이고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이냔 말이다! 이렇게 형평성과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는 비전이 있을 때 진정한 도시 계획이 가능한 거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공원이라는 공공인프라가 가지는 사회적 가치와 기능을 뉴욕이라는 도시는 더 크게, 그리고 더 장기적으로 보고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원이 필요하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사는 산호세 집 근처에는 공원이 없다. 사실 아파트 바로 앞에 공원이 생긴다는 말에 혹해서 계약한 이유도 있는데,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공사는 시작할 기미조차 없다. 아마도 공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이상 다음에 이사를 갈 때는 어릴 때 놀이터처럼 월세 다음으로 체크하는 요소가 되지 아닐까 싶다. 역세권 보단 공세권. 이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는 곳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공원은 복잡하고 스트레스받는 현실에서 달아나 내가 마음을 정화하는 공간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공원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원이란 녹지 공간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휴식과 안정감, 행복을 경험하고 그것은 추억이 되어 삶의 자양분이 되니까.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아지트가 하나씩 있는 것처럼 누구나 공원을 누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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