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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Jul 26. 2017

백수의 버킷리스트 (3)

06 외운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가장 어렵다는 기능시험을 한 번에 통과하였다. 합격 비결의 첫 번째는 마지막 수업에서 아빠와 닮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그저 공식을 열심히 외운 것이다.


부활한 'T자 코스' 덕분에 많은 응시생들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내가 시험을 볼 때도 반은 붙고 반은 떨어졌다. 시험에서는 운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시험장에 충분히 익숙해졌느냐가 성패를 좌우했다.


기능 수업이 75%쯤 진행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추가 수업을 들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에서 만난 강사님 덕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강사님은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대신 3시간 동안 배운 것을 정리할 시간을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외웠다. 어느 구간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머릿속에 정리한 덕분에, 전혀 긴장하지 않고 무난하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대망의 도로주행시험.


결과만 말하자면, 나는 쓰디쓴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재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 턱걸이 수준으로 합격의 목걸이를 거머쥘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코스를 외웠다. 학원에서 나눠준 유인물은 물론이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코스 자체를 완전히 외워버렸다. 혹시나 이것도 부족할까 싶어 조수석에 타고 실제 코스를 돌기까지 했다. (이건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부질없는 짓이었다)


시험 보는 날엔 꼭 비가 왔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와이퍼를 켠 채 운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모든 길을 다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 상황은 내 생각과 같지 않았다.


"이건 알려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그때 잘 대처하는 방법 밖에..."


조수석에 앉은 감독관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도로주행은 무조건 외운다고 해서 붙는 시험이 아니었다. 나는 우회전 커브를 잘못 타서 해서는 안될 후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불합격을 받고,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도로주행이 회사 생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를 하는 동안에는 치열하게 새로운 것을 외웠다. 모든 것을 외우고, 정리하고, 나만의 매뉴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퇴사하고, 또 퇴사했다.


외운 것과 아는 것은 달랐다. 나는 내가 외운 것에서 조금만 틀어지면 항상 불안해했다. 업무에 있어 여유로운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다. 그것은 외운 자가 아닌 아는 자의 여유였다.


그래서 비가 오더라도, 신호가 갑자기 바뀌어도, 누군가가 끼어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도로는 전쟁터 같은 곳이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러니까 항상 도로의 흐름을 잘 살펴야 해."


추가 수업까지 들은 끝에 나는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혼자서 운전하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합격 도장을 받고 돌아오는 길, 나는 여러모로 운전면허를 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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