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걷어낸 시선에서 자유를 맛본다
한 걸음을 내딛으니 앞 사람의 머리가 거의 코 앞에 닿을 듯 가깝다. 보폭은 줄이고 시선은 접어 발 밑에 붙들어둔다. 상대의 보폭보다 더 나아가면 발뒤꿈치를 밟거나 부딛히기 십상인 맨하탄 타임스퀘어 앞. 휴일 거리에서 이방인인 나는 쉬이 또 다른 이방인들을 만난다. 아니 그들과 스쳐 지나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이나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인파는 나를 둘러싼 벽과 다를 바 없다. 그들과의 어색한 부딛힘을 갖지 않으려 보폭을 좁혀 걷는다. 그 사이 내가 누리고 싶었던 자유의 걸음은 사라지고 거대한 사람의 띠를 만들 듯 함께 밀리고 휩쓸려갔다.
이윽고 나는 멈춰섰다. 그러자 발걸음에 붙들렸던 시선이 의식의 세계로 넘어오며 며칠째 불편하던 등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등줄기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쌀쌀한 날씨지만 햇살이 비추이는 휴일 아침. 사람들의 모습은 밝고 기대에 부푼 듯 즐거워 보인다. 그들 중 아무도 나를 침해한 흔적은 없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래 전에도 이런 통증을 겪은 적이 있다. 평생 한번 걸린다는 ‘Shingles’ 그것은 거짓이었다. 바이러스는 몸 속 어딘가에 잠복하고 있다가 스스로를 돌봐야 할 순간에 불현듯 찾아온다. 특별한 통증으로 각인 되었던 그 때의 기억들은 이후 덧칠해진 여러 기억의 갈래들을 뚫고 그때와 같은 원인이란 신호를 보내왔다. 앞으로만 ‘걸어왔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음 걸음을 위해 몸과 마음의 길 또한 준비해야 하는 시간임을. 나는 그렇게 이 거리의 이방인이자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스위스의 초현대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은 황량하리만큼 철골만 남은 인간이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자코메티는 조각가이면서 화가이자 샤르트르와도 깊게 교류한 철학자이며 사상가이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20세기를 정의하는 예술가이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조각상을 제작한 조각가, 피카소가 유일하게 질투했던 예술가라는 이름들로 그를 이야기한다. 실제 세계 경매시장에서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경매된 조각상은 자코메티 작품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자코메티의 여러 작품 중 ‘걸어가는 사람’은 해넘이 직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사람의 그림자처럼 철골 뼈대 위에 붙은 살과 군더더기를 모두 떼어낸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걸어가는 사람’은 오래 전 처음 책자에서 보고 그 기괴함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던 작품이었다. 그 때는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왜 그런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작품의 존재 자체가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 때론 나의 몸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군더더기가 사라진 가벼움으로, 때론 그 반대의 무거움으로 몸이 줄었다 늘어났다 하는 기괴한 꿈을 꾸기도 했다. ‘걸어가는 사람’은 그 때의 그 사진만으로도 박제하여 품어옴직한 하나의 상징이자 포장되지 않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로댕의 조각작품에서 보여지던 힘과 강렬함과는 다른, 실존에 대한 사유와 삶의 초연함과 의연함을 느끼게 해 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그의 작품과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세사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비쩍 마른 몸과 거칠거칠한 청동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인체의 모습과 살아있는 듯 강렬한 눈빛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코메티의 천재성을 시기하던 피카소의 작품이 그의 ‘걸어가는 세사람’ 작품 뒤에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인물을 해체하고 면과 선으로 분해한 피카소의 작품 앞에 ‘걸어가는 세 사람’은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로 보란듯이 의연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시선에서 자신의 욕망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망들까지도 군더더기로 모두 떼어낸 진정한 가벼움을 본다.
나는 다시 뮤지엄을 나와 발걸음을 내딛었다. 보폭은 더 이상 타인을 벽으로 느끼며 제한을 두지 않고 가볍다. 그것은 마음의 벽을 해체한 자유의 걸음이다. 거리의 사람들 또한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세 사람’과 같이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뮤지엄의 작품이 그대로 거리로 나와 있는 듯 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삶의 무게를 시간의 무게에 싣고 삶이 허락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 의식의 등불로 등줄기의 통증을 삼키려는 듯 나는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