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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pr 13. 2023

오일파스텔로 뭘 그릴까

연말정산 환급금을 받으면 뭘 할까 연초부터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월급은 ‘미술용품 온라인스토어 화방넷’으로 스실사실 새나가고 있었다. 마카 스물네 자루는 시작이었을 뿐, 드로잉북, 사인펜, 각종 붓펜, 수채색연필, 유성색연필, 수채오일파스텔, 전문가용오일파스텔, 고체물감, 워터브러시 소·중·납작, 4B연필, 6B연필, 스케치펜슬, 피그먼트 라이너 0.1·0.3·0.5·0.8·1.2, 클리어파일 등등을 주섬주섬 사들였다.


근데 막상 나열해 보니 생각보단 양호한 느낌...? 아직 콩테, 목탄, 건식파스텔, 아크릴물감, 유화물감, 캔버스(!)까지는 손대지 않았으니 한 가닥 이성은 남아 있는 듯하다.


택배가 오는 족족 사용해본 결과, 수채물감이든 수채색연필이든 수채오일파스텔이든 ‘물’이 들어가는 재료는 시기상조 같았다. 학창시절 미술과 멀어진 몇 번의 고비가 바로 1. 골치아픈 연필데생 2. 까딱하면 지저분해지고 종이가 우는 수채화 3. 좀처럼 깔끔하게 칠해지지 않던 포스터칼라가 아니었던가. 이번에도 수채는 역시 어려웠다. 큰맘 먹고 두꺼운 수채용지를 샀는데도 종이가 울었다.


다음으로 알쏭달쏭한 재료는 오일파스텔이었다. 색도 예쁘고, 꾸덕꾸덕 진하게 칠해지는 촉감도 좋은데 이걸로 뭘 그려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까딱 잘못하면 찌꺼기가 흰 여백에 묻어나 무섭기도 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이 굵은 재료로 어쩌면 그렇게들 섬세한 그림을 그리던지!


검색에 검색을 하다보니 찌꺼기 없이 색을 바르고 싶으면 손가락이나 면봉으로 자연스럽게 문지르면 되고, 과감하게 콱콱 찍어서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는 등의 팁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오일파스텔 36색을 하나하나 칠해보고 면봉으로 정리하며 손에 익히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다음으로 그려본 라일락 나무. 그리다 보니 매력이 있었다. 미끈하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게 쭉쭉 밀고 나가는 맛이 있달까? 매우 빠르게 한 장이 뚝딱 그려졌다.



이어서 도전해 본 바다 풍경. 작은 섬들이 오종종 떠 있던 남해바다가 그립다.



왠지 갑자기 그리고 싶어진 개미굴. 방 4개를 각각 재밌는 공간으로 채워보고 싶었는데 뭘 그릴지 생각도 안 날 뿐더러, 작은 면에 섬세한 그림을 그려넣을 실력도 못 됐다. 며칠 고민하다 그냥 글씨를 써넣었다. 쓰다보니 굴 모양 자체가 꽤 재밌어 보였다. 양팔 양다리를 한껏 펼치고 어딘가로 놀러 가는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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