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Sep 15. 2023

너도 날 실망시킬 거니?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어떤 글로 컴백할까 막연히 미루고만 있었다. 참 나, 이게 뭐라고 어렵게 생각했을까? 그냥 아무 말이나 끄적여도 되는 블로그일 뿐인데 말이다. 생각난 김에 그냥 가볍게 횡설수설해볼 테다.


어릴 적에 숙제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내내 놀다가 밤늦게야 겨우 책상에 앉아 알림장을 펼쳤을 때의 그 아득함, 밀린 일기를 몰아 쓰던 개학 전날의 괴로움, 대학시절 리포트를 쓰겠다고 피씨방에 갔다가(컴퓨터가 없었음) 한 줄도 못 쓰고 새벽 4시가 되어버렸을 때 주변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던 게임 소리들.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내가 절대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나에게 '남이 시켜서 하는' 모든 일들은 싫고 나쁘고 힘든 것이었다. 그 싫고 나쁘고 힘든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지만, '계획 쪼개기'니 '루틴 만들기'니 벼라별 작심삼일을 반복하며 어찌저찌 꾸역꾸역 적응해서 살아왔다.


그렇게 나를 통제하며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들도 어느새 '내가 시켜서 하는 일'이 되어버리곤 했다. 글쓰기나 피아노나 그림 등등에 흥미가 생기면, 언젠가 이 일들도 숙제처럼 느껴질까봐 미리부터 걱정하고, 숙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실망했다. '그럼 그렇지. 처음엔 재밌었는데 이젠 부담스러워. 억지로 노력해야 되는 걸 보니 이 일도 역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나봐. 아니면 모든 걸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내 성격이 문제일까? 성격이 운명이라는데 역시 난 평생 이렇게 살 팔자인가?'


이렇게 살아서 안 될 건 없다. 실패한 삶이든 성공한 삶이든, 불행한 삶이든 행복한 삶이든, 가난한 삶이든 부유한 삶이든, 짧은 삶이든 긴 삶이든, 각각의 삶이 모두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유일하고 평등하다는 게 내 믿음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고,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는 거다. 그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는 내 이야기가 좀 더 내 마음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내가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가 되고자 수십 년간 아등바등했지만, 어린이 나이의 두 배 세 배가 되어도 도무지 그 경지에는 이르러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흔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겪고 있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필수요소니까.


살다보니 놀랍게도, 모든 숙제가 다 싫고 나쁘고 힘든 건 아니었다. 노래 동아리 시절 새로운 악보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 열심히 음표를 읽지 않았던가? 매일 첫문장 하나를 과제로 내주는 글쓰기 모임, 매주 그림 주제를 두 개씩 정해주는 길드로잉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는 '오늘의 첫문장은 뭘까', '이번 주 그림 주제는 뭘까'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지 않았던가? 궁금했던 과제가 드디어 공개되면 '와, 재밌겠다! 잘해봐야지'라며 신나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내가 나자신에게 부여하는 숙제(=계획, 결심, 목표... 등등)에 대해서는 그런 설렘이 느껴지지 않을까?


새 악보와 첫문장과 그림 과제는 왜 재밌고 자신있었을까? 내가 선택한 동아리고 워크숍이어서? 강제성의 정도가 딱 적당해서? 과제가 쉽고 흥미로워서? 남이 내주는 숙제의 의외성과 새로움 덕분에? 그렇다면 나는 내게 재미있는 숙제를 내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끊임없는 수강생으로서, 평생학습자로서, 교육소비자로서 살면 되는 건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대로, 즐겁고 흥미롭고 자유롭고 자신있게 스스로 해나갈 수는 없을까? 왜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시동이 꺼지는 걸까? 나라는 자동차는 왜 이렇게 연비가 낮을까? 하고 싶은 일도 이 지경인데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 그러니까 회사일이나 집안일이나 운동 같은 일들이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 그나마 회사일은 강제성이 엄청나니까 어쩔 수 없이 해내는데 나머지는 엉망진창이다. 또는, 회사일에 빼앗기는 시간과 에너지 때문에 더더욱 엉망진창이 되어간다...라는 건 너무 변명일지도.


글 한 편이 온통 답은 없고 물음표뿐이다. '그래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라거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니면 '나는 참 생각이 많아서 탈이다'라는 식으로라도 결론을 낼까 싶었지만, 이 많은 의문들의 답을 아직 못 찾은 게 사실인 만큼, 그냥 모르는 상태로 끝내련다.




p.s. 잠수기간 동안 만든 인스타 그림계정

이제(@ije_draw)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매거진의 이전글 오일파스텔로 뭘 그릴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