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Sep 21. 2023

오늘도 괜찮았고 내일도 괜찮겠지

인생의 법칙은 유익할 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융통성 없거나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주는 법칙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어떤가. 그게 내가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배운 내 인생의 법칙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할수록 스스로에게 가혹해졌다. 나는 평생 나를 가두었던 이 법칙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고, 그 후부터는 '착한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되뇌며 이 법칙에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다.
오웬 오케인,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책]




방 안이 어둑해지던 토요일 저녁, 6시를 향해 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이런 젠장, 오늘도 헛된 하루를 보내버렸네' 하고 생각했다. 숱하게 경험한 일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거나, '내일이라도 보람차게 보내보자'는 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뭐 어때?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닷새 동안 일하고 맞은 주말에, 늦잠 좀 자고 점심 차려 먹고 부국제 영화 스케줄 짜고 추리소설을 읽으며 뒹굴대다가 예능프로그램도 좀 보고, 뭐 그렇게 놀다가 저녁을 맞았을 뿐이다. 나 또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대단히 슬프거나 화나는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하루를 보냈을 뿐인데 왜 자괴감을 느껴야 할까?


즐겁고 보람차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희망이 어느새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변질됐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굳어버린 사고방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책의 저자가 '착한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되뇌었듯, 뭔가 붙잡을 만한 주문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내 법칙을 깰 수 있는 나만의 문장은 뭘까?


살면서 그나마 자주 의지한 말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인데, 한 번뿐인 인생을 지나가기만 바라며 살기는 좀 아까웠다. '다 잘될 거야' 같은 문장은 '잘되어야만 한다'는 뜻으로 들려 거리감이 느껴졌다. '사랑'이나 '감사' 같은 아름다운 말들은 그냥 왠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막연히 궁리하던 중, 토요일 저녁의 '괜찮지 않나?'에서 실마리가 풀려 다음과 같이 적어봤다.


(혹시 믿기지 않더라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오늘은 괜찮은 하루였다.
내일도 괜찮은 하루일 것이다.
괜찮은 정도면 충분하다.


앞으로 맞이할 날들이 늘 멋지거나, 잘되거나, 즐겁거나, 성공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럭저럭 '괜찮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어떤 괴로운 날에도 괜찮았던 점 한둘쯤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을 돌아볼 때 '오늘은 얼마나 잘했나?'가 아니라 '오늘은 뭐가 괜찮았더라?' 생각하고, 내일을 떠올릴 때 '내일은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일도 그냥 괜찮겠지' 생각한다면 인생을 좀 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거대한 우주 속에 티끌만 한 인간일 뿐인데, 그렇게 막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혹시 믿기지 않더라도,)', 군더더기 같은 괄호 속 표현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오늘은 괜찮은 하루였고 내일도 괜찮은 하루일 거라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날도 있을 테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 괜찮아'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해주고 싶었다.


좌우명은 벽에 써붙여야 제맛


야근에 시달린 뒤 집에 오는 길, 홀린 듯이 편의점에 들러 야식거리를 고르다가 이 말을 떠올려봤다. '회사는 싫지만 할 일은 끝냈으니 오늘은 괜찮은 하루였다. 내일도 괜찮은 하루일 것이다. 괜찮은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하다라... 충분한가...? 어쩌면 충분한지도...? 충분한 것 같기도...?' 그러자 왠지 과자를 사지 않고 편의점을 나올 수 있었다. '내 인생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식욕으로 착각했다가, '네 인생 괜찮고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말에 진정된 것처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가 그랬듯 '오늘도 괜찮았고 내일도 괜찮겠지' 또한 만병통치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건 알겠다. '부족하다'는 느낌에 휩쓸리지 않도록, '괜찮고 충분하다'는 닻을 내려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첫 출근 직전의 주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