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Jun 30. 2019

첫 출근 직전의 주말

제18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방문기


취업을 했다. 반 년 동안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7월 1일부터 다시 9to6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월세를 밀렸을 마지막 고비였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지만, 반 년이나 놀다가 다시 출퇴근을 하려니 걱정도 된다.

며칠 전 ‘책방 연희’에서 미쟝센 단편영화제 홍보물을 받고 지금이 영화제 기간이란 걸 알았다. 단편영화제는 7~8년 전에 딱 한 번 가본 게 전부지만, 이번에는 왠지 급격하게 끌렸다. 뒤늦게 찾아보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모두 매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첫 출근을 앞둔 토요일 아침 무료하게 맥모닝을 먹다가 충동적으로 용산 CGV를 향해 출발해버렸다. 취소표를 노려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쯤 대책 없는 모험을 떠나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쟝센 단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은 다섯 개 장르로 나뉘어 있다. 비정성시(사회적 관점을 다루는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멜로드라마), 희극지왕(코미디), 절대악몽(공포/판타지), 4만번의 구타(액션/스릴러). 그중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장르는 코미디. 단편의 매력을 살린 기발한 영화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책 막 다루는 타입


영화관에 도착해서 프로그램북을 샀다. 나는 영화제 프로그램북 읽기를 매우 좋아한다. 다양한 영화들의 시놉시스를 읽으며, 다른 창작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하는지 쭉 둘러본다. 프로그램북 뒤쪽에는 경쟁부문 상영작 전편에 대한 리뷰가 실려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매표소 모니터를 보며 취소표가 나오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편히 앉아서 영화관 어플로 확인하면 좋았겠지만 내 핸드폰은 폰중독을 막기 위해 인터넷 기능을 잠가둔 상태여서 몸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단편영화에 엄청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런 집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영화관 도착 시각은 12시쯤, 영화 시작 시각은 3시 반. 운 나쁘면 황금 같은 토요일의 3시간 이상을 로비에 서서 날릴 수도 있었다. 그냥 다른 영화를 볼까,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집에 갈까 고민하다 1시가 넘어 딱 한 자리가 났을 때의 그 희열이란!ㅠㅠㅠㅠ 재빨리 무인매표기로 달려가 거침없는 터치터치터치로 입장권을 뽑았다. B열 3번 자리 취소해주신 분 감사합니다. 흑흑.




그때부터는 느긋하게 앉아 프로그램북을 정독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선택한 ‘희극지왕3’ 영화들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았다. (출처: 제18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 展 프로그램북)

<유월>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않고 춤추는 소년 유월은 어느 날 사립초등학교에 발발한 집단무용증(a.k.a. 댄스바이러스)의 원흉으로 지목당하며, 질서에 목매는 담임선생 혜림과 옆 반 선생들에게 추격당하기 시작하는데…….

<오늘 이 순간>
졸업 연극 무대에서의 실수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겨 연극과를 자퇴하고 경영학과로 간 주환은 연극 동아리 메소드 팀원들을 만난다.

<주인이세요>
그는 자전거 중고 거래를 하기 위해 만난 그녀가 마음에 든다.

<노량대첩>
임용고시 5수생 연주는 답답한 속을 뚫기 위해 매일 일탈을 저지른다. 고시 합격을 방해하는 적을 만나게 된 날, 일탈을 하다 경찰에게 잡히는 위기에 처한다.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연주의 인생. 하지만 바로잡을 기회가 곧 찾아온다.




네 편의 단편영화 중에서 나는 <노량대첩>에 가장 마음이 갔다. 감독 프로필이 텅 빈 걸로 봐서 신인감독의 데뷔작 같았는데, 만듦새는 조금 거친지 몰라도 캐릭터와 이야기에 매력이 있었다.

<유월>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본 아역배우 심현서 군이 나와 너무너무 반가웠다. 단편인데도 배우와 스태프 수가 엄청났다.

<주인이세요>는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코미디였다. <오늘 이 순간>은 개그 코드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소재는 흥미로웠다.

영화제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박수를 치는 문화다.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에게 축하와 응원을 보내는 동시에, 평소의 조용한 영화관과는 다른 축제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감독과 배우를 먼발치에서나마 실제로 볼 수 있었던 GV도 재미있었다.





나는 소설을 쓰지만 문학잡지보다 영화잡지를 즐겨 읽고, 북콘서트보다 영화제를 좋아한다. 소설 분야에서는 이런 분위기의 축제를 만들 수 없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신춘문예처럼 딱 한 사람만 선발하거나, 몇몇 유명한 작가들을 초대해 북콘서트를 하는 식이 아니라, 신선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축제를 열 수는 없을까? 문학의 특성상 영화제 같은 방식은 힘들겠지만…….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래도 독립출판 마켓이 가장 축제다운 분위기인 것 같다. 남은 6개월은 쓰던 장편을 마저 쓰고, 열심히 돈 벌어서 내년쯤엔 독립출판물이나 한 권 더 만들어봐야겠다. (의식의 흐름 무엇?ㅋㅋㅋㅋ)


매거진의 이전글 3년 전 <옥자> 촬영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