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을 듣고
산비탈 우리 동네는 엄청난 급경사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빌라 신축 바람은 여기까지 불어 닥쳐서, 대형 덤프트럭이 드나들다가 브레이크가 고장 나 급경사 길을 달려 내려가는 사고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상가 건물을, 한 번은 벽돌집을 들이받았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길에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거의 20미터마다 하나씩 있다. 조금이라도 걸어 올라가려면 몹시 힘들기 때문이다. 버스 뒷문에는 ‘이곳 경사가 너무 급해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하기가 대단히 힘드니 안전을 위해 모두 손잡이를 꼭 잡아 달라’는 호소문이 붙어 있다.
2016년 봄, 그 마을버스 뒷문에 또 다른 안내문이 붙었다. 이 구간에서 무려 ‘봉준호 감독’의 신작영화 <옥자>를 촬영하게 되어 모월 모일 배차 간격을 조정한다는 안내문이었다. 헐, 대박사건! 나는 촬영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이 촬영장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부숭부숭한 머리에 청바지 차림으로도 대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봉준호 감독이 스태프들과 이런저런 상의를 했다.
당연하게도 그날 촬영한 장면은 내리막길 추격 신이었다. 누가 찾아냈는지 몰라도 우리 동네는 내리막길 신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거대 돼지 옥자를 납치한 초대형 트럭 뒤를 미자가 필사적으로 따라 달렸다. 미자 역의 안서현 배우는 추리닝 차림으로 뛰고 또 뛰었다. 뛰다가 앞으로 고꾸라질까봐 내가 다 무서웠다.
영화 촬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장면 찍는 데 한 시간 두 시간씩 준비를 했다. 우리 구경꾼들이 오히려 더 빨리 지쳐갔다. 나 또한 시시각각 당이 떨어지고 다리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초췌한 몰골로 편의점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다가 때마침 들어선 봉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진열대 뒤로 숨었다.
3년여가 흐른 오늘, 점심을 차려 먹으며 뉴스 팟캐스트를 듣다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헉!’ 소리를 질렀다. 황급히 일기장 파일을 열어 미친듯이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를 찍어댔다.
헉!!!!!!!!!!!!!!!!!!!!!!!!!!!!!!!!!!!!!!!!!!!!!!!!!!!!!!!! 대박!!!!!!!!!!!!!!!!!!!!!!!!!!!!!!!!!!!!!!!!! <기생충> 황금종려상 탔댄다!!!!!!!!!!!!!!!!!!!!!!!!!!!!!!!!! 허걱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씨 나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대박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내 일기장의 현주소-_-)
평소 인터넷 접속을 차단해 놓고 사는지라, 어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종일 자소서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접한 엄청난 소식에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칸이 뭐길래, 상이 뭐길래 내가 다 이렇게까지 신나는 걸까.
<설국열차>라는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고 몇 년을 기다린 적도 있었는데 정말 세월이 빠르다. <기생충> 개봉일도 안 올 것 같더니 이번주로 다가왔다. <기생충>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오래오래 봉 감독의 차기작, 차차기작, 차차차기작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