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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Dec 10. 2023

집 떠나지 않고 디지털 디톡스


‘무인도에 떨어지거나 독방에 감금되더라도, 종이와 펜만 있다면 심심할 일이 없지 않을까?’라는 공상을 청소년 시절부터 해왔다.


종이와 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냔 말이다. 온갖 주제의 글을 쓰고, 벼라별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고, 윷놀이나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도 하고, 내 맘대로 타로카드 비슷한 걸 만들어 오늘의 운세도 점쳐보고, 접거나 찢거나 물에 불려서 인형이나 장식품도 만들고, 작사작곡도 해보고, 뭐 그러면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충분히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오히려 좋지’ 않을까? 끊임없이 눈과 귀를 잡아끄는 현대사회의 숱한 유혹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심플한 방에서 하얀 종이를 마주하고 고요히 앉아있을 수 있다면. 문 아래 투입구로 삼시세끼 식사 배급이 들어온다면. 인터넷도 광고도 없고 돈을 벌 필요도 없다면. 오히려 더 알차고 창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드라마나 유튜브를 보며 저녁을 먹는 시간이 내 피곤한 삶에 대한 유일한 보상처럼 느껴지고, 이 보상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숏폼 콘텐츠를 끊임없이 넘겨보며 ‘와 신기하다, 와 웃기다, 너무 유익하다’라고 느끼자마자 잊어버린다. 슬펐다가, 놀랐다가, 귀여웠다가, 화났다가, 감동했다가 등등 오만가지 감정들을 징검다리 밟듯 초단위로 널뛰어다닌다. 중독을 막기 위해 스마트폰 잠금앱을 꾸준히 써 왔지만, 시간이 되어 핸드폰이 잠기면 먹던 밥상을 빼앗긴 것처럼 짜증이 난다.


현대사회의 유혹, 그중에서도 특히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에 사로잡힌 나는 이제 더 이상 종이와 펜만으로는 즐거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내 나이 어느덧 사십대, 벌써 두뇌회로가 이렇게 굳어졌으면 어쩌지?


한번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무인도나 독방에 갇히진 않더라도, 단 하루라도 디지털 기기 없이 종이와 펜, 책 몇 권만 가지고 오프라인 상태로 있어 보고 싶었다.


내가 상상한 방법은 이랬다.

1. 핸드폰 맡아주는 곳으로 템플스테이 2박3일

※ 2박3일 이상이어야 아침에 깨서 밤에 잠들 때까지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음

2. 저렴하면서도 깨끗한 비즈니스 호텔을 찾아 핸드폰을 금고에 넣어두고 2박3일간 지내보기

3.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서 호텔처럼 침대와 책상만 있는 미니멀한 방을 만들어 틀어박히기


그리하여 어느 주말 오전, 스마트폰으로 3시간이 넘게 ‘디지털 디톡스 숙소’, ‘템플스테이’, ‘북스테이’, ‘투룸’ 등등을 검색하다 현타가 왔다. 단지 내가 가진 물건 몇 개를 안 쓰기 위해서, 숙박비 십수 만원을 들여 집을 떠나야 한다고? 심지어 이사를 가야 한다고? 이게 맞아?


마음을 고쳐먹고 방 배치를 다시 하기로 했다. 목표는 디지털 기기를 한곳에 몰아넣고 접근성을 낮추는 것.


내가 사는 집은 부엌(+현관)과 방이 분리된 1.5룸인데, 주로 방 안에서 놀고 먹고 입고 자고 모든 생활을 한다. 현관에 딸린 부엌은 설거지와 요리, 빨래 건조, 수납 등에 쓰는 재미없는 공간으로, 방에 비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먼저, 방에 있던 데스크톱과 프린터, 태블릿, 멀티탭, 각종 거치대와 충전선을 싹 다 뽑아다가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좁은 책상으로 옮겼다. 방 안에서 ‘충전’을 못 하게 하는 게 포인트였다. 핸드폰을 방으로 가져갈 수는 있지만 충전이 안 되니 오래 쓸 수 없고, 밤에 잘 때도 방 바깥에 꽂아둬야 하니 잠들기 전에 폰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방 안을 ‘아날로그 존’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한 일은 다이X에서 커튼봉과 커튼을 사 와서 ‘디지털 존’(부엌 책상)을 덮어버린 것이었다. 평소에는 커튼을 닫아 각종 모니터들이 보이지 않게 해놓고, 사용할 때만 커튼을 연다. 물론 커튼 따위는 철창도 아니고 방탄유리도 아니므로 언제나 얼마든지 열어서 쓸 수 있지만, 눈에 바로 보이는 것과 한 겹이라도 가려놓는 건 다르다. 넘기 쉬운 담장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이렇게 공간분리를 하니, 절에 들어가거나 호캉스를 떠나거나 투룸으로 이사를 가지 않고도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핸드폰을 부엌 책상에 두고 커튼을 닫은 채 생활하면 된다. 일단 토요일 하루를 오프라인으로 보내보기로 했다. 가족 단톡방에 내일 하루는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메시지를 남긴 뒤 핸드폰을 껐다.


과연, 이 커튼을 열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p.s. 성공하긴 했는데 여기까지 쓰고 그리니 주말이 다 가버렸다-_-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이어서 올리는 것으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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