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
어제, 2024년 12월 9일 화요일은 예순두 번째 아날로그 휴일이었다.
첫 아날로그 휴일로부터 딱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닷새 동안 세 번의 집회와 한 번의 콘서트를 다녀오니 혼자 있어도 구호와 음악이 귀에 쟁쟁했다. 잠시 멈춰 진정해야겠구나 싶었다. 일요일 밤 핸드폰을 끈 뒤 화요일 오후까지 디지털기기를 켜지 않았다. 차를 끓여 마시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이 글을 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껏 행복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무원 세계를 탈출해 모든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1년 중 60여 일을 아날로그 휴일로 보냈고, 보통 날에도 되도록 많은 아날로그 시간을 확보하려 했다. 이 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글로 써서 12월쯤 브런치 연재를 시작해 내년 여름쯤 책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경사를 맞아 작가의 모든 책을 출간 순서대로 정주행하고 있었다. 노벨상 작가의 작품을 모국어로 읽는 행운을 오래 누리며, 지난 30년 동안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따라가보고 싶었다. 『여수의 사랑』(1995), 『검은 사슴』(1998), 『내 여자의 열매』(2000),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까지 읽고 이제 막 『바람이 분다, 가라』(2010)를 시작한 참이었다.
지난주 그날도 평소처럼 핸드폰 없이 잠들어 핸드폰 없이 일어났고, 핸드폰 없이 외출해 줌바 수업을 다녀왔다. 점심 무렵에야 잠깐 핸드폰을 열어봤더니, 이럴 수가! 하룻밤새 온 나라가 뒤집어진 게 아닌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비상계엄이라니, 이게 실화라고? 2024년에? 바로 어젯밤에? 미쳐도 미쳐도 이 정도로 미쳤다고?
내 평온은 한순간에 박살났다. 즉시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 하루종일 뉴스 속보를 보다가, 저녁이 되면 거리에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의 순진함을 실감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명백한 잘못을 하고,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 외쳤으면 이번에는 빨리 탄핵이 될 줄 알았다. 그들이 저렇게까지 뻔뻔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길게 봐야 하는 거였다. 다음, 다다음 집회를 준비해야 하는 거였다.
온갖 말들이 넘쳐날 것이다. 복잡하고 지엽적인 논란이 본질을 흐릴지도 모른다. 방향 잃은 분노에 휩쓸려 엉뚱한 상대와 싸우며 분열되는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혼란과 환멸과 체념이 번져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잡는 건 내 몫이다. 위기와 갈등이 있더라도 결국은 함께 이뤄낼 거라고 믿고 싶다.
핸드폰을 끄고 아날로그 시간을 보낸 이야기가 이 시국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주제일지도 모른다고, 현실을 외면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태도로 읽힐지도 모른다고 지난 며칠간 고민했다. 솔직히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 한동안은 정말 현실을 외면한 것도 맞다. 하지만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더 혼란스러울까. 맑은 정신으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모든 소음을 끄고 머릿속 흙탕물을 가라앉히고 싶다.
지난 일요일 저녁, 이제는 실시간 뉴스와 댓글을 멀리하고 다시 신문과 잡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쏟아지는 속보들을 죄다 바로바로 따라잡으려면 내 시간을 다 바쳐야 한다. 하루종일 분노와 궁금증에 쫓기게 된다. 사람이 계속 100도 이상으로 팔팔 끓는다면 그만큼 빨리 증발되고 말 것이다. 나는 필요할 때 끓고 보통 때는 식으며 일상의 균형을 잡고 싶다.
그러기 위해 앞으로도 종종 아날로그 시간을 보낼 것이다. 종이책과 종이잡지를 읽고, 손글씨를 쓰고, 손그림을 그리고, 핸드폰 없이 산책을 나갈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집회에 나가 한 사람분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사람이 많아 핸드폰이 안 터져도 조바심 내지 않을 것이다.
.
.
.
p.s. 이 글을 쓰고 나서 이틀 만에 뉴스를 보니,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에 1년 만에 올리는 글이다. 혹시라도 기다린 분들이 계시다면 면목이 없다. 예전처럼 마감에 허덕이지 않도록 웬만큼 미리 써놓고 싶었다. 지난 1년간의 이야기를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할 예정이다. 댓글을 바로 확인하거나 전부 답하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