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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승욱 Oct 29. 2020

내 삶을 바꾼 OO

책? 한 마디? 사람!

내 삶을 바꾼 OO

이야기의 주제나 인터뷰의 질문으로 흔히 다뤄지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생을 바꾼 책” 이라거나, “내 삶을 바꾼 한마디” 이런 것들. 식상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사람마다 생각도 경험도 다르다보니 그 답변들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편으로 나의 삶도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내 인생 책은 뭐지? 내 삶을 바꾼 한마디가 있나?’


우선 '내 인생 책'. 딱히 없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인생 책을 꼽기는 아직 조심스럽다. 많은 책에서 조금씩 조금씩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텐데 한 책만 꼽는 것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고, 앞으로 읽어야 할 책도 무척 많은데 벌써부터 인생 책을 선정하자니 조심스럽기도 하다. 


'내 삶을 바꾼 한마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명언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감동적인 말, 멋진 말, 재미있는 말들도 많이 들었지만 ‘나를 바꾸었다’라고 할 만큼 묵직한 한 마디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귀를 닫고 살아온 것일 수도.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비록 나를 바꾼 ‘책’이나 ‘한마디’는 없지만 ‘사람’은 있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이나. 아직 살아온 인생이 짧다는 점과 사교성이 별로 없는 탓에 사회활동 반경이 좁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두 명이라는 숫자는 제법 많은 셈이다. 그 두 명은 내가 이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었을 때, 내 행동을 바꾸고 내 삶의 가치관을 형성했다.



그냥 들어주기 시작했다

한 명은 나의 학교 J선배다. 당시에 나는 내 전여친(현 아내)와 연애 중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메마른 사람이었다. 전여친(현 아내)이 말을 하면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논리적인 순서로 어떻게 배치가 되는 건지, 왜 앞뒷말이 다른 건지 하나하나.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아주 재수가 없는 스타일이었는데, 어떻게 참고 나를 계속 만나주었는지 고맙고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나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전 여자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털어놓지 못했다. 소중한 마음을 털어 놓아봤자 내가 갈기갈기 찢어 놓을게 뻔한 데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싶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내 학교 선배 앞에서 아주 말을 오래, 심지어 잘!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게 너무도 인상 깊게 뇌리에 박혔다. 어떻게 남자친구인 나에게는 말을 잘 못하는데, 학교 선배인 그 형에게는 그렇게 생각을 잘 털어 놓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형이 워낙에 말을 잘 들어준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쉽게 판단하거나 조언하지 않고 그냥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구나.’ 그 뒤로는 여자친구의 말에서 논리를 찾지 않았고,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냥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대화가 더 잘 통했고, 아내는 지금까지 실없는 말도, 감정표현도 다 잘 한다.



이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또 다른 사람은 교회에서 만난 K선생님이다. 어느 주일의 늦은 저녁이었다. 교인 몇명이 모여 다같이 저녁을 먹고, 대화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K선생님의 어린 아들 둘도 교회에서 드럼을 치며 놀고 있었고, 아내 되시는 분이 아들들과 놀아주고 계셨다. 선생님은 멀찍이 뒤에 앉아 가족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계셨다.


내가 알기로 K선생님의 출퇴근 거리가 꽤나 멀었다. 꽤 늦은 주일 밤이었기에, 다음날 출근이 부담되시거나 피곤하실 것도 같았다.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내일 출근하시려면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래야지. 그런데...” 


사실 선생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가족들을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눈빛에서 빛났던 다정함이 기억 속에 깊게 남아있을 뿐이다. 선생님은 아들들과 아내분이 함께 있는 시간을 보는 것이 행복하신 듯 했다. 그래서 조금의 피곤함이나 ‘언제까지 저러고 놀 참이지...’ 하는 불만섞인 내색하나 없으셨다. 그저 다 놀고 갈 때까지 언제라도 기다려주실 것만 같았다.


그 한 모습을 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선생님이 평소에 어떤 아버지이신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란 이래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 때는 이십대 초반이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사진처럼 찍혀서 내 머리속에 오랜 시간동안 계속 남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생각했다. 나도 이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정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아버지. 몇 음절 되지 않지만 참 많은 것을 포괄하는 아버지 상이다.




학교 선배와 교회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하는지를 배웠다. 그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내 삶의 모습이나 내 가정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나만 알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말에 여전히 논리라는 채찍을 휘두르고, 내 컨디션에 따라 아내와 아이를 채근하려고 하는 인내심 없고 성급한 아버지가 되었을지도. 그래서 지금도 그 두 분께 참 감사한 마음이 크다. 아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좋은 남편이라고 여긴다면, 그 덕의 8할은 이 두 분 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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