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미와 아름다움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음악은 머리로 듣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미라는 것도 눈이 없으면 지각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에 관한 역사가 건축이나 음악에서 느꼈던 감정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르네상스 회화나 조각을 봐도 왜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가?
이게 진정 만오천 년 전 구석기 시대의 미개인이 그린 그림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훌륭한 비례를 가진 순록이 있다.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정리하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인간에겐 뛰어난 시 지각 감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는 표현 능력도 지녔다. 그들은 무엇보다 ‘개념적 사유’에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개념적 사유’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미에 대한 왜곡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왜곡은 반복되는 계절에 의해 ‘개념’이란 상을 만들며 시작된다. 문명은 대상의 특징을 개념의 틀로 가지 치고 추상(抽象)한 기하학 양식과 회화 기법들만 주목게 했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은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예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욕구를 깨운다.
나는 아직(?) 시 지각적 척도와 비례를 미와 대상을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책 속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에 대한 본질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미의 이데아와 시학(詩學)의 한계에 대한 재치 있는 논쟁은 인간 내면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예술을 향한 이분법적 고찰은 미학에 철학을 더하기도 하고 미를 더욱 왜곡시키기도 했다.
예술은 마법이기도 했고 종교적 도구이기도 했다가 르네상스에 이르러 과학과 동일시 여겨졌다. 오랜 기간 미학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미켈란젤로에 의해 근대 예술가를 탄생시킨다.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예술은 내면에 기인했다. 하지만 다 빈치는 예술을 외부와 과학에서 찾았고 근대예술철학은 데 스틸로 추상조차 명료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는 현대 디자인의 기초가 된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비극과 희극의 도구로서 미학엔 낭만이 있다. 하지만 지식의 저주와 닮은꼴인 ‘개념적 사유’들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그리게 했다. ‘아는 것’은 어떤 회화적 기법이나 보편적인 심미성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본능으로 여러 대상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한 번에 고를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것이다.
설명할 수 없지만 명확하다니? 이런 미에 대한 인식의 불완전성을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 보편적 심미 등으로 대신하려 했다. 물론 주관적 사유는 보편타당이 될 수도, 미를 개념화할 수도 없다. 칸트가 주장한 ‘형식’은 공감한다. 그러나 그의 공통적인 이념의 필요성은 스스로 보편의 실패를 말한다. 에셔의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는 것처럼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다.
이제 헤겔은 미와 예술을 동일시하고 예술을 상징, 고전, 낭만으로 나눈다. 상징적 건축과 정신적 표현을 조각한 고전, 그리고 낭만에 다다른 관념적 표상은 예술로서의 한계를 암시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미적 범주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낳는다. 피아노를 부수고 온몸에 페인트칠하고 몸부림친다. 창작의 자유라는 핑계로 예술과 사기를 구분할 수 있을까?
르네상스를 지나면서부터 계속 돌고 도는 느낌이다. 반복과 순환의 고리. 미는 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머리에 있는 것인가? 오랜 의문이 이렇게 쉽게 풀리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개념적 사유’에 길든 인간인 건 분명하다. 저자는 에셔의 <그리는 손>을 보여주며 우리가 악마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