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것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영화 <빛나는>
상실. 잃다는 뜻을 두 번이나 거듭하는 단어. 이 단어의 뜻은 글자가 가리키는 그대로다. 어떤 것이 아예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 그러니까 더 이상 내가 볼 수도, 만질 수도, 겪을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상실이다. 그 이후를 어떻게 견뎌야 할 지 모르겠는 것도 상실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크게 할퀴고 가버리는 지도 모를 상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유독 사람을 잃어버리는 데 약했다. 연애하다 이별하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헤어져서 그 사람을 잃어버리고 나면 패턴은 늘 똑같았다. 그 사람이 데려다주던 현관문을 살펴보고, 우편함에 편지가 없나 뒤져보고, 집 앞에 기대 서 있진 않을까 기대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나면 집에 들어와 한참을 울었다. 마치 물에 녹인 소금처럼 내 삶 곳곳 배지 않은 곳이 없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내 삶 어느 순간에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나는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빛나는>에도 이별 후 나처럼 삽질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중에는 나처럼 한낱 연애로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은 없다. 훨씬 더 무거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집착을 보고 있자니 지난 날의 내 생각이 나더라. 그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보며 오히려 내가 치유받았다. 도저히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이 갈 영화, <빛나는>은 그런 영화다.
다들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절대로 쥐고 놓지 않는 것. 아무리 늦었어도 만원 지하철을 그냥 보내버리는 쿨한 사람조차 그런 것은 하나쯤 있다. 너무 소중해서 잃을 수 없고, 설사 그게 먼저 훌쩍 떠나버린다 해도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그런 것. <빛나는>의 여자주인공 미사코에게는 가족이, 남자주인공 나카모리에게는 카메라가 그렇다. 미사코는 아버지에 이어 편찮으신 엄마가 사라질까 두렵고, 과거에 사진작가였던 나카모리는 점점 사라지는 시력으로 인해 제대로 쓸 수 없는 카메라가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연애를 하던 나처럼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붙들어 맨다.
미사코는 엄마를 보러 집에 갈 때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 함께 찍은 석양 사진을 매만지며 그리워한다. 어머니만큼은 놓고 싶지 않아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드리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팩스로 연락을 한다. 나카모리는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손으로 더듬거려 가며 애써 카메라로 세상을 찍는다. 그러다 카메라를 도둑 맞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카메라를 다시 찾아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진실은 명확하다. 아픈 어머니는 곧 죽음을 맞이하시게 될 것이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되면 카메라는 찍을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진실 말이다. 가슴 아프지만, 현실적인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 속 재미있는 장치가 있다면, 바로 이들에게 깨달음을 여러모로 주는 영화 속 영화 <주조>다. (정확한 영화명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본다면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음성 해설가 미사코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해설에 참여하는 베리어프리 영화로 등장한다. 여기서 주인공 주조는 아내가 기억을 잃어가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노인이다. 주조의 아내는 그만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고, 그 때마다 주조는 '함께 있는데도 함께 있고 싶다'며 그녀를 놓지 못한다. 결국 그녀가 죽고 나자, 모래 바람이 불어오는 사막 언덕을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 미사코는 이 마지막 장면의 해설을 두고 결국 영화 속 영화의 감독 키타바야시를 찾아가는데, 그는 마지막 장면을 희망적으로 해석한 미사코에게 그것은 결코 희망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나이가 되면 무언가 바라도 안될 수도 있고, 그냥 있어도 무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일종의 '달관'인 듯 하다. 주조에게서조차 자신이 찾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찾는 미사코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저기에 녹아 있다. 결국 가야하는 것들은 가야 하고, 보내줘야 하는 것은 보내주어야 한다는 그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진리.
결국 그들은 상실에 가까이 가게 된다. 미사코는 사라진 엄마를 찾다가 뒷산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기억을 되살리며 아버지에 대한 상실을 떠올리고, 나카모리는 완전히 어두워진 세상을 살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길을 더 잘 찾는 느낌이다. 나카모리는 육교 위에 있는 미사코에게 이제 당신이 나를 쫓아오지 않아도 제대로 가겠다며 다가가고, 미사코도 헤매기만 하던 주조의 마지막 해설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해낸다. 결국 시간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각자의 상실에 각자의 방법으로 적응하며 살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그렇게 친구들과 웃다가 집에 와서는 엉엉 울어 대고, 멀쩡히 스터디를 하다 멍을 때리고, 청승맞게 혼자 일기를 쓰며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지는 순간이 덜컥 찾아온다. 며칠이 지났는지 몇 개월이 지났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반드시 오는 순간이다. 그러면 무심코 내가 이미 가버린 것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원래 내 것이었던 장난감들도 시간이 흐르면 사촌동생들 것이 된다.(고흐흑 바흐흑)
그러니까 그 사람 역시 단 한번도 '원래'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도 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것이 아닌 것. 그저 잠깐 나를 스쳐지나갔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회복의 시작이었다. 미사코의 부모님과 나카모리의 카메라도, 그저 그들을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 어떤 순간도 영원하지 않다. 사랑하는 연인, 다정한 가족, 나만 바라봐주는 반려동물, 아끼던 목걸이, 때묻은 일기장. 아무리 소중했어도 반드시 끝은 온다. 그러니 우리는 긴 인생에서 봤을 때 잠깐 스쳐지나가는 그 순간, 그 찰나. 어떤 라스트 씬을 눈에 담을 지를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상실들이 상처와 함께 남기고 가는 교훈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