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실외기를 곁들인...
장마인지조차 모를 장마가 지나니 불볕 더위가 찾아왔다. 내 시야가 머무는 베란다 바깥 공원 나무들은 저 멀리 코타키나발루에서 봤던 정글처럼 무성하다. 비가 오고 해가 내리쬐니 모든 것들이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그 중에 우리집에서 가장 무럭무럭 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에어컨 실외기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에어컨 실외기는 날마다 일을 하며 역량을 키우고 있다. 저 친구 입장에서는 내가 하루빨리 재택근무를 마치고 출근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아침 일찍 커피 한 잔을 내려서 공원이 보이는 방향으로 책상에 앉았더니 바쁘게 돌아가는 실외기가 내 눈길을 끌었다. 그러다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근무를 마쳤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이 좀 걷혔다 싶어 커튼을 걷고 나니 하얀 실외기 위에 없어야 할 검은 점이 보인다. 그렇다. 비가 오고 해가 내리쬐니 성장하는 것에는 벌레들도 있다. 듣도보도 못한 딱정벌레 타입. 검정색에 육각형의 잽싼 몸을 가진 이 친구는 그와 대비되는 하얀색 실외기 호스를 타고 다니며 나를 놀렸다. 나는 혹시나 실외기 안에 들어가기라도 할까봐 한 손에 에프킬라를 들고 잠시 서서 그를 구경했다. (왜냐면 이 친구가 서 있는 쪽 창문에는 방충망이 없었기 때문에 막상 내쫓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두 개의 더듬이를 가지고 작은 실외기를 탐험했다. 처음엔 호스를 타고 유려하게 미끄러지더니 어느 새 본체에 안착해 네모난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안돼,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호스가 빠져나오는 작은 구멍 입구에 이 친구가 안착했기 때문. 나는 재빨리 에어컨을 다시 돌렸고 위잉 거리는 흔들림에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이 친구의 판단은 두 개의 더듬이가 하는 것 같았는데, 마치 고양이가 수염의 넓이를 통해 자신이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의 사이즈를 재는 것처럼 이 친구는 더듬이로 앞을 파악하고 걸음을 옮기는 듯 했다.
다행히(나에게 다행) 그곳을 빠져나온 이 친구는 땅 쪽을 향해 아래쪽으로 기어가더니 실외기 모서리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그의 더듬이와 머리 절반은 사실상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고, 더듬이로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듯 앞....팔(너무 징그러워)을 허공에 휘적휘적 거리더라. 분명히 앞에 아무 장애물이 없는데! 심지어 장애물이 없다못해 바닥도 없어! 단박에 깨달은 그는 능숙하게 후진을 하기 시작하더니 아직까지 내 실외기를 탐험 중이다. (제발...가줘)
그런데 문득 보고 있자니 그냥 내 인생사와 다를 게 없다는 비약적인 생각도 든다. 저 친구는 오직 자신의 더듬이만 믿고 뭔지도 모르는 저 공간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탈출할 때까지 돌아다니는 행인. 어쩌다 실외기에 떨어졌는지,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심지어 윗집 실외기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아주 커다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이 친구의 바로 옆에도 뚝 떨어지곤 했다. 그건 마치 인생에서 무방비 상태인 내게 인생이 가끔씩 던져주는 폭탄 돌림같은 거. 운 없으면 맞는 그런 거. 운명의 얄궂은 장난 같은 거.
참나 실외기를 조금만 떠나면 드넓은 공원인데...얜 어쩌다 가로 70 세로 50 정도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갈 방법을 모르는 걸까 허공에 뒷다리도 마저 던지기가 무서운 걸까.
나이가 들면서 모험과 멀어지고 정착에는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우 예전에 저거 어떻게 했을까"가 됐을 정도로. 뭘 어떻게 해 그냥 했겠지. 그치만 그러기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예전이든 지금이든 쉽지 않았지만 그땐 해봤을 거고 지금은 안 해보는 거겠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가로 70 세로 50 정도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헤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글을 마무리하다 말고 지금은 어떻게 됐나, 베란다에 나가보니 친구는 사라졌다. 설마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공원으로 날랐을까? 여하튼 청춘처럼 열심히 헤매던 작은 친구는 쓸데없는 글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잘 가 칭구칭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