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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ne Jun 06. 2018

중년의 심정

어디까지나 지나갔기에 아름다운

서른이 조금 넘었을 때 100년 전에 쓰인 소설을 읽다가, 서른이 넘은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저자가 ‘어느덧 중년이 되어’라는 표현을 붙인 것을 보고 실소했던 기억이 난다. 어찌나 웃겼던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해두었는데 누가 썼는지,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서른이 넘은 인물을 중년으로 표현했던 것 하나만은 생생히 기억한다.  


 중년이란 무엇일까. 하나 확실한 것은 서른을 기점으로 몸의 기능이 추락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필이면 20대후반-서른 초입에 과다한 업무로 건강을 잃기도 했다. 몸의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희노애락에 버틸 신체적 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지혜가 쌓인다던가, 그리하여 40세를 불혹이라 부르며 흔들림없는 마음가짐이라고도 하던데, 실상은 흔들릴만한 마음을 뒷받침할 기력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집에 있는 시집들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20대에 차곡차곡 쌓아뒀던 시집들을 들춰보는데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들 감정들이 날 것으로 치닫는 시들만 나와서 책장 하나하나 넘기는데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 감정이 20대의 전유물은 아니겠지만, 30대 중반을 넘어 곧 40대가 초입인 지금 보기에는 한 때 지나갔던 그 무언가들이었다. 시인들이 모조리 젊은 시절에 시를 쏟아내고 죽는 것이 아닐테니 그들도 결국 한 때 지나갔던 그 무언가를 재연하는 경우가 있을텐데, 그것을 시간이 지나 반추하며 다듬어낸 결과물들의 아름다움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지나간 것이기에, 재연물에 불과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한 때 일정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울어제끼는, 어떠한 서러움이 있었다. 그 서러움을 느끼고 내뱉는 일련의 소비 과정은 그 당시의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예민함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재연할 수 없는, 감정을 소비하는 그런 방식이 그 때는 있었다. 시집들을 만져보니 문득 밀려오는 그 때의 감정들은, 어디까지나 지나갔기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지금의 내 시기에 지금의 내 상황이 주는 어떠한 서러움은 물론 있다. 다만 지나간 시간 속에서 이불 속이든, 회사 화장실이든, 퇴근길이든, 어디서든 울어제꼈던, 길게 눈물을 빼며 목구멍이 덥던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는 않을 것이다. 허덕허덕 보내는 하루 속에서 눈물이라도 흘릴 에너지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 이 기점의 나이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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