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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비 Jun 29. 2016

"다행이군요."

제주 농가주택 고치기 | 만화 조각이 시공을 넘어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느리지만 나태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적막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재미있지만 시끄럽지 않고, 철학적이지만 어렵지 않은 삶을 위한 공간 만들기  








1. "다행이군요."


2014. 11. 05 의 기록


 이 집을 공사하던 때에 우리는 제주 동쪽 마을에 연세를 얻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은 정반대 쪽인 제주 서쪽 마을에 있다. 공사 초기, 우리는 매일같이 왕복 140km의 거리를 오가며 (표선-모슬포) 공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항상 '블로그고 뭐고.. 기록이고 뭐고.. 잠이나 푹 잘 수 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 상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리 미련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곳에 눈 붙일 곳만 구하고 일을 했어도 훨씬 편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는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숙박비보다 기름값이 조금 덜 들어갈 것 같았던가 보다. 그런 사정으로.. 밥도 매일 도시락을 싸서 3분 카레 따위와 먹었었다. 


 우리는 100살 먹은 안채는 일단 두고,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바깥채를 먼저 고쳐서 우리의 살림집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을 시작했는데, 이건 도대체 사람이 살기는 했던 건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집 공사는커녕 못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나는 물론이고, 손재주가 꽤 좋긴 하지만, 목공일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J도 사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우리는 숨을 "흐읍!!!!!" 깊게 들이마시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이 집은 집안 모든 방들과 거실이 미닫이 문으로 연결되어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자그마한 집구석에 커다란 미닫이 문만 5개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미닫이 문들부터 모조리 떼어버리기로 했다. J가 칼로 실리콘을 잘라내고, 망치로 탕탕 두들기고, 빠루로 밀어 뽑아내니 수욱- 하고 쉽게 빠져나왔다. ( 내 기억에는 그렇다..;;) 





미닫이 문을 모두 떼어내니 이렇게 커다랗게 뚫린 구조가 되었다. 







  J가 문틀을 떼어내는 동안 나는 벽지를 뜯어보기로 했다. 음... 나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랄까.. 물론 벽지를 떼어내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게 쉽게 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사전 지식이 없이 무작정 달려들어 맨손으로 뜯어내는데, 무슨 벽지가 최소 10장씩은 발려져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 한 장은 왜 이리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정말, 벽지 뜯다가 울 뻔했다. (아니.. 정말 울었는지도..) 



 하다 하다 열이 뻗...받아서 , 인터넷의 도움을 받았다. 물을 고루 뿌려 적신 후, 칼날이 달린 스크래퍼로 긁어내면 쉽게 벗겨진다고 했다. 우리는 당장 철물점으로 달려가 펌프 분무기(?)와 스크래퍼를 사 왔다. 열심히 펌핑을 해서 벽지 위에 물을 뿌리고, 스크래퍼로 샤샤샥 긁어낸다. 무식하게(?) 하던 때보다는, 훨씬 잘 벗겨진다. (떼어낸다는 표현보다는 벗겨진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 그래도 여전히 힘은 들었다. 아,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화가 난다. 벽지를 떼어내면서 집이 크지 않음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여기는 방 쪽의 벽인데, 어쩐 일로 벽지가 너무 잘 떨어져서 무슨 일인가... 했다. 기분 좋게 벽지를 떼어내는 찰나.. 벽지와 함께 벽에 발라져 있던 오래된 흙들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 이게 뭐지?.. 음?..??... 아.. 우리 집이 돌로만 지어진 돌집이 아니라, 안에는 흙이 발라져 있는 흙집이기도 하구나.. 벽지를 뜯으면서 알게 되었다. 돌도 있고 시멘도 있고 흙도 있다. 하하 


 오래되어 마른 흙들이 점착력도 떨어져서 건들기만 해도 후두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애초에 제거해버려야 한다. 손으로 훑으면 후두두 떨어지니 벽지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울며 짜며 벽지를 떼어내는데 재미난 것들이 꽤나 많이 나왔다. 옛날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벽지를 바르면서 신문도 갖다 붙이고, 교과서나 시험지 같은 것들도 가져다 붙인 모양이다. 만화책의 한 귀퉁이도 나오고, 1985년도 제 1회 모의고사 영어 시험지도 나왔다. 신기하다... 심지어 문항들이 필기로 쓰여있었다. 엄청나다. 




 그리고 발견한 만화의 한 조각.. "다행이군요." 

모르겠다.. 벽지는 내 마음대로 떼어지지도 않고, 잠도 푹 자지 못해 피곤하고, 며칠째 벽지만 붙들고 시름하고 있자니... 온갖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만화 한 조각의 발견이 그때의 나를 얼마나 위로해주었던지.. "다행이군요."라는 한 문장이 지친 마음을 얼마나 쓰다듬어 주었던지. 정말 신기하고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옛날 이 집에 살았던 누군가가 붙여놓은 만화의 한 조각이 시공을 넘어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그렇게 엄청난 위로를 받고는 또다시 힘차게 벽지를 뜯었다. 



 아... 아직 뜯을 벽지가 한참 남았는데, 벽지를 뜯어낸 쓰레기로만 마대자루가 20 포대 넘게 쌓였다. 

그래도 괜찮아. 뭐든 "다행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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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남서쪽 조용한 마을 모슬포에 '민박 맨도롱또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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