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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비 Mar 06. 2017

겨울의 한 복판에 있었지만,
진짜 겨울에 가고 싶었다

눈사람이 되어가며 걷고 싶었다. 


 겨울의 한 복판에 있었지만, 진짜 겨울에 가고 싶었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하얀 겨울. 원체 눈을 좋아하는 나는 제주로 이사한 뒤로 바람은 살벌하게 불어대면서 펑펑 내려 쌓이는 눈은 도통 보여주지를 않는 제주의 겨울 덕에 한참 눈이 고파있었다. 물론,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내가 사는 남서쪽 해안마을은 제주에서도 가장 눈이 적게 내리는 곳 중 하나이다. 그렇게 나의 눈 타령은 제주에서의 세 번의 겨울을 지나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하면서 극에 달해있었던 것이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그대로 길가에 잠시 서있으면 꼭 눈사람이 될' 정도로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다들 반나절이나 하루 당일여행 코스로 잡는다는 그 작고 오래된 항구도시에서 일주일 중 5일을 지내기로 했다. 크지 않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몇 날 며칠이고 걷고 싶었다. 눈을 맞으며, 눈사람이 되어가면서.  











 숙소로 잡은 곳은 기차역에서 관광거리와는 반대 방향, 느린 걸음으로 15분 정도 가야 했다. 5일 내내 숙소로 오가는 길을 걸으며,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잠깐의 일상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생각했다. 낯선 여행지 속에서 돌아갈 집이 있고, 눈을 맞고 돌아온 우리를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이다. 나에겐 낯설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그곳의 삶을 잠깐이나마 빌려서 살아보는 기분이랄까. 유명한 명소를 찾아가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남기는 것보다 더 매력적이고, 기억에 남을 그런 순간들은 이렇게 잠깐이나마 그곳의 삶을 살아보는 데에 숨어있다. 



 겨우내 눈이 하도 많이 내려서 전에 내린 눈을 미처 다 치워낼 새도 없이 또다시 눈이 내려 그 위에 쌓인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눈들은 때때로 햇살 나는 날에 살짝 녹기도 하고, 다시 얼어붙기도 하면서 차도와 인도 사이, 그리고 중앙선에 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장벽이 사람 키만큼 높이도 쌓여있다. 눈이 이렇게나 많이 내리니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스노부츠를 신고 다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냥 스니커즈나 운동화, 심지어 구두를 신은 사람들도 많았다. 미끄럽지 않을까..? 아니면 특별히 안 미끄러운 구두라도 만들어내는 걸까? 그래도 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인들은 스노부츠를 신고 있었다.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스노부츠를 신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걷는 노인들의 모습이 좋았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한 노부부를 보았다. 할머니는 워낙 겁이 많으신지, 혹여나 길이 미끄러울까 온몸에 힘을 주고 조심조심 걷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 할머니보다 항상 저만치 앞에 가 계셨는데, 조금 더 멀어질까 싶으면 매번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정확히는 못 알아들었지만 대충 이런 식이 었던 것 같다. "에구에구 미끄러워 죽겠네..!", "아이코- 넘어질뻔했네!", "영감- 좀 잡아줘요." 그럴 때면 매번 할아버지는 저만치 앞에 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뒤돌아보셨다. 그리고 할머니가 자길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겁 많은 할머니도, 그런 할머니를 말없이 기다려주는 할아버지도. 












 이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눈 치우는 도구는 꼭 가지고 있다. 현관 입구에 눈 치우는 삽이 없는 집은 단 한 곳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겨우내 눈이 내리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 눈은 그냥 쌓아두고 보는 게 아니라 꼭 치워야 할 대상일 것이다. 눈이 너무 쌓여서 다니기가 힘들거나, 지붕 위에 꽤 쌓인 눈덩이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지나는 사람을 덮치는 사고도 꽤 많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조금 날이 잔잔하다 싶으면 동네 사람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서 지붕 위에 눈을 치우고 있었다. 여행객인 내게는 그마저도 낭만적인 모습으로 비쳤지만, 일상을 살아보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 작은 항구 도시는 바다를 끼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르막길이 참 많기도 하다. 한 번은 이 눈 쌓인 오르막길을 한 번 올라보고 싶어 걷던 참이었다. 그러다 저 멀리 무언가 빠르지만 느릿하게 내려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우편배달부였다. 아...! '오르막 골목길을 오르면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겠지' 생각하며 오르던 길에 만난 의외의 일상이었다. 그래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도 누군가는 편지를 부치겠지. 그 편지를 누군가는 배달해줘야겠지. 우편배달부 아저씨는 그 미끄럽게 다져진 오르막 눈길을 민첩하고도 느릿하게 (모순적이지만 이보다 맞는 표현이 없다.) 그리고 능숙하게 달리며 집집마다 들러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었다. 









 또 어떤 하루는 "오늘은 이 길로 가보자!" 하여 갔던 골목길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일상. 설국의 아이들이었다. 유치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 가까이 가보니 아이들 모두 유치원 마당에 나와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며 놀고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설국 아이들이 노는 법이구나' 싶었다. 어리지만 매년 겨울마다 그리도 많이 눈을 볼 텐데, 어쩜 저렇게 세상 다 가진 듯이 행복하게 웃으며 놀 수 있을까.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눈의 아이 몇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 통하지 않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한 아이가 눈 뭉치를 만들어 내게 던졌다. 나도 이에 질세라 눈 뭉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던졌다. 그렇게 잠시 동안 놀다가 가던 길을 가려는데, 아이들 중 하나가 J(남편)에게 "바이바이 옷상!" 하고 말했다.


 "바이바이 아저씨!" - 








제주 모슬포 낮고, 자그마한 옛집. 

활엽수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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