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는 열차에 일단 올라타야 하는 진짜 이유
신문을 읽다가 재미있는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지각 사회'라더군요. 청년들이 취업과 결혼, 출산 시기가 예전보다 계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지각 사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상당히 선정적인 네이밍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 진단이 내려졌는지는 공감합니다.
저는 결혼과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들 둘이 있지만 앞으로도 간섭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취업은 다릅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일 때부터 늘 강조했더랬습니다.
‘엄마 아빠가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중고등학교 때까지야. 대학교 가서는 등록금과 용돈을 너희들이 벌어야 할 거야. 물론 우리 집은 다행히 서울에 있으니 먹여주고 재워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것도 한시적이야. 결국은 돈을 벌어서 집을 떠나야 해.’
큰 아이가 지금 대학교 2학년인데, 이렇게 말한 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등록금을 대줄 형편이 안되어서는 아닙니다.(물론 부담되는 금액이긴 합니다.) 다행히 제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용돈을 줄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다수의 청년들에 비하면 아주 형편이 좋은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 마음에 자기 자식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대학을 다니고 이왕이면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은 아이의 ‘돈 버는 기능’을 작동하게끔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0대에 과외나 커피숍 알바, 편의점 알바 등으로 자신을 낮춰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돈 버는 기능’이 퇴화되어 아주 미약하거나 없어집니다.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 가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시험을 보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까지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취업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대기업에서 잘려 나오는 경우,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잔소리를 들어내지 못합니다. 기한을 맞춰서 일을 끝내지 못합니다. ‘돈 버는 기능’이 퇴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돈 버는 기능’은 일하면서 점점 강해집니다. 부모님 세대는 평생 일을 해왔기 때문에 회사를 잘려도 몸을 낮춰 새 직장을 금방 찾습니다. 자존심을 낮추고 자식뻘 되는 상사 밑에서도 꾹 참고 일할 수 있는 면역력을 일하는 동안 길렀기 때문입니다. 그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일은 대부분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지시나 요구를 듣고 들어주는 일입니다. 오랜 기간 훈련이 되어야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고된 노동 끝에 잠깐씩 올뿐입니다.
제가 엄청난 부를 쌓아놓은 부자 아빠여서 평생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굳이 자식의 ‘돈 버는 기능’이 퇴화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얼마나 오래 살 지 모릅니다. 자칫 장수가 재앙이 되는 시기까지 생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저도 준비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물고기를 평생토록 공급할 수 없다면 물고기 잡는 방법과 함께 물고기 잡는 기능을 키워줘야 합니다. 자식이 ‘일 자체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지 않도록 해 줘야 할 것입니다.
살면서 ‘돈 버는 기능’이 퇴화된 ‘일 자체를 할 수 없는 몸’이 된 사람들을 몇 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장애 때문이 아닙니다. 사지 멀쩡합니다. 다만 자신의 의지대로 하루 일과를 해 나갈 수 없는 이도 있었고, 지나치게 높은 자존심 때문에 그 누구의 질책이나 충고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의 삶은 갈수록 비참해집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부모님의 삶마저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사회의 첫출발을 중소기업에서 하느냐 대기업에서 하느냐는 이후 삶의 질을 천양지차로 차이 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취준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해됩니다. 초봉의 차이가 엄청나고 이후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복지나 인센티브에서도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더군요. 그러니 이왕이면 대기업 들어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과 취업준비라는 명목으로 차일피일 미루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건 더욱 어마어마한 차이를 낳습니다. 지각이 아니라 아예 삶을 거부하는 쪽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꽤 많은 히키코모리들이 생각보다 많은 집에 하나씩 있습니다. 그들을 세상에 나가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조금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더라도 눈 질끈 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제 손으로 돈을 벌어서 자신의 자존감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부모의 역할 중 가장 큰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하나뿐인 귀중한 인생이니까요.
아이에게 큰 꿈을 꾸는 한편으로 일단은 제 앞가림을 하라고 안쓰럽지만 다그치는 이유입니다.
달리는 기차에 일단 올라타라고 독려하는 건, 이런 마음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