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변방의식' 극복을 위하여
"우리 우정, 절대 변하지 않기다!"
초등학교 때 이렇게 서로 맹세한 친구 두 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삼총사’라고 칭하며 정말 매일 같이 함께 놀았지요. 하지만 그 맹세는 졸업도 하기 전에 반이 갈리면서 헛된 약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점 사이가 멀어지다가 중학교 이후로는 연락이 끊기고 말았지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사실 간혹 생각은 납니다만 너무 만나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인간을 병들게 해. 난 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죽을 때까지 투쟁하겠어."
대학시절 이렇게 말했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뒤였지만, 여전히 그 관성이 작용하던 민주화 ‘끝물’ 시절이었습니다. 몇 다리 건너서 그 선배가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매우 자본주의적으로요.
“열심히 살수록 힘들어져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성공을 향해 뛰라던 자기 계발 강사는 그렇게 말하니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죽도록 배우고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감사와 칭찬이 그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걸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도 바뀔 수밖에 없겠지요.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으로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본 사람은 그 산의 풍경을 묘사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바다의 깊고 푸름을 노래하겠지요. 그렇듯 그들의 말은 그들이 그때 그 시점에 파악한 삶의 진실일 뿐입니다. 그 풍경을 나에게, 우리에게 전달했을 뿐이지요.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국문과 대학원 다닐 때 술잔을 기울이며 나는 평생 문학연구에 한평생을 바칠 거야,라며 숱하게 떠들었습니다. 그랬던 저는 학문을 접었습니다. 그 말을 지겹도록 들었던 후배들은 교수가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때 그 시점에서 제가 바라본 삶에 대해, 그 풍경에 대한 제 인상을 말한 것일 뿐이지요. 어쩌면 그냥 그 당시 흠모했던 노교수 흉내를 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 회사의 사장님은 늘 '우리나라는 변방의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과거 중국이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중국도 잘 안 지키는 그들의 학풍이나 예절을 오히려 우리나라는 더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변방의식이라는 거죠. 미국의 영향이 클 때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자칭 '락커'라는 친구와 자칭 ‘래퍼’라는 후배가 떠올랐습니다. 락커는 '랩'을 하지 않았고 래퍼는 노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락 스피릿이고 그게 힙합이라나요. 락 스피릿과 힙합 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한국락커가 춤추고 랩 하면 비난하기 바빴고 노래하는 래퍼는 디스 했습니다. 그것이 비롯했던 중심부에서는 모든 것이 융합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남들’은 그렇게 늘 바뀝니다. 젊은 ‘남들’의 말은 나이 든 ‘남들’의 말이 지웁니다.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삶의 기준이 ‘남들’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남들’이 바뀔 때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남들’은 늘 바뀝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는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쉽게 답을 내기 어렵지만, 그래서 항상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가 남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이 텅 비어가지 않으려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100세 시대라고 쳐도 반환점을 돌아버린 입장에서는 조금 조급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미처 배우지 못해 서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변방의식'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답게 우뚝 서는 삶, 더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