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는 건 핑계
어느날 저녁에 베란다 창가에 기대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 창가에 비친 나를 보게 됐는데 내 모습이 무척 낯선거야.
왠지 기운 없어보이는 푸석푸석한 얼굴과 나이듦을 확인시켜주는 몸매.
일 끝나면 남편과 술 한잔 기울이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였고 그 외에 취미라곤 그닥 없었어.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서 성악, 캘리그라피를 배워봤지만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우진 못했어.
무료함이 나를 덮칠 때쯤 우연히 아파트 입주민 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어.
월요일 저녁 7~9시까지 풋살 같이 하실 분 모집!
남편은 50이 넘은 나이에 무슨 축구를 하냐며 면박을 주더라.
"몸 생각을 해야지. 자기가 어떻게 젊은 사람들과 축구를 해?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몸 상하고 병원비 나가잖아"
남편이 하는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괜스레 서운함이 파도처럼 몰려왔어.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 되는 거잖아. 다른 운동에 비해 돈도 많이 안 들고 운동복과 운동화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거잖아.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래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지.
드디어 월요일이 돼서 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온라인 마트에서 주문한 풋살화를 가방에 넣고 떨리는 마음으로 운동장으로 갔어.
근데말야,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 믿지 못하겠지만 난 내성적인 오형인데다 낯가림이 아주 심하거든. 친해지면 완전 무장해제되어 활발한 성격이 나오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선 말도 안 하고 행동도 조심하게 돼. 무엇보다 환경에 적응하는데 좀 시간이 걸려. 그래서 처음 날 보게 되면 굉장히 소심해 보일 수 있어
암튼 첫번째 운동을 하러 갔는데 쭈뼛쭈뼛 사람들 틈에 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연습을 시작했어. 처음부터 난관이었어. 운동장 두 바퀴를 도는데 숨이 턱까지 차더라. 겨우 두 바퀸데도 10바퀴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을 끌고 기본 패스 연습을 했어. 공을 발로 받고 찬다는 게 재밌고 신기했어.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패스하는 방법, 공을 받는 방법 등을 배웠는데 생각했던 것보단 어렵지 않았어.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감독님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따라서 하려고 노력했어.
꽤 재밌었어. 몰입을 하면 재밌어. 오랜만에 땀 흘리며 여럿이 같이 운동을 해서 좋았어. 온전히 내게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살짝 흥분되더라.
기본기 연습을 끝내고 5 대 5 경기를 했어. 감독님이 처음 왔다고 맨 앞 공격수 자리에 서게 했어.
"골대가 보이면 무조건 슛하세요."
감독님의 은밀한 지령을 받고 난 요동치는 심장을 다독이며 앞에 섰어.
'삐이--'
휘슬이 울리고 우리 팀 공격이 시작됐어. 맨 앞에 선 나는 안절부절했어. 우리 팀 선수가 나한테 공을 패스했고 난 그걸 얼떨결에 받아냈어.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누군가 공만 얄밉게 발로 쏙 빼내갔어.
나는 '어' 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막아!"라는 소리에 정신을 다시 차려 달려오는 선수를 막으려고 달려들었어. 그런데 나를 아주 쉽게 따돌리더니 우리 골대로 힘차게 공을 차는 거야. 야속하게도 그 공은 엄마 품에 안기듯 우리 팀 골대로 쏙 빨려 들어갔어.
"어, 어,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소리쳤어. 정말 미안했거든.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야속한 내 몸뚱이를 원망할 틈도 없이 맹공격이 쏟아졌고 난 공을 따라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녔어. 10분 경기가 1시간처럼 느껴졌고 입안에선 피냄새가 진동했어. 허리가 절로 굽혀졌지만 나이 들어 못 뛴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죽기 살기로 끝까지 뛰었어. 그래, 맞아.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어. 70킬로그램이 넘는 몸으로 운동장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어.
마지막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와, 살았다."는 외마디 외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어.
"어때요? 할 만해요? 많이 힘들죠?"
라고 내 안부를 묻는 감독님을 보며 마음 속에선 '네! 죽을 거 같아요.'했지만
"네, 많이 힘드네요. 하지만 재밌어요."
라고 대답했어.
재밌었어. 오랜만에.
오랜만에 숨이 찼고 오랜만에 피맛을 봤어. 오랜만에 최선이란 걸 한 것 같아.
살면서 몰입이란 걸 한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난 그날 알았어. 앞으로 내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거란 걸 말이야.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고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지금의 나도 좋지만 조금 더 발전한 내가 더 좋아.
내가 지금 무얼 할 수 있지? 지금 시작하면 늦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건 핑계라고 생각해. 늦어서 못한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우리 인생은 길잖아.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거든. 망설이다 보면 내 아까운 청춘이 도망갈 거야.
후회하기 싫어서 난 도전을 해.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삶이 시작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