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물이 있다면 바로 양말이다. 첫사랑 J가 내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 바로 양말이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양말이라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싶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J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160이 될 무렵, 모두 첫사랑이 진행 중이던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친구였다. 늘 두 번째 줄에 기웃거리던 나와 달리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줄곧 앉았다. 우리의 사이는 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다만 같은 보습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같이 들으며 집에 갔다. 이따금 적막한 정류장에 앉아 시시껄렁한 유행어와 농담, 그리고 담임 흉을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첫사랑보다는 그냥 동물원을 탈출한 고독한 유인원이 만난 첫사람(?)에 불과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레 볼 일이 없어졌고, 다시 만난 건 수능을 100일 앞둔 어느날이었다. 수능을 100일 앞두고 중학교 친구들끼리 모여 거국적으로 기념을 하자며 모였다. 암담하고 막막한 미래, 인디언 기우제와 같은 수능이 주는 불안과 초조함 앞에 우리는 무력했고, 그 무력함을 약간의 알코올(?)로 소독했다. 어른들의 감시를 따돌리는 스릴과 알코올이 모세혈관을 흐르며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은 화학 작용 덕분에 즐거웠다. 취기에서 벗어나고자 무리에서 하나둘씩 빠져나가 산책을 즐기고 왔는데, J가 가자고 눈짓을 해 나도 엉겁결에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산책을 하며 그 시절의 우리를 다시금 상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즐겨 듣던 라디오의 DJ, J보다 훨씬 커진 나의 웃자란 키와 막차가 끊겨서 집까지 같이 걸어간 썰 등을 나누며 현재와 과거를 오갔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취기로 인해 스텝이 꼬여 넘어진 J를 일으키기 위해서 J의 오른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줬는데, 그때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J의 손을 잡았는데 꼭 새 양말을 처음 신을 때의 느낌처럼 보드라웠고, 온몸의 미세혈관이 미세하게 간지러웠고, 방금 바른 핸드크림의 향이 아카시아 향처럼 피어올랐다. 첫사랑이었다.
그 이후로 우연히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J를 몇 번 마주쳤다. 3년 내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그 사건 이후로 이상하게 종종 마주쳤다. 그날의 사건은 취기로 인한 입력 오류였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모세혈관의 장난은 나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나의 시야와 발길이 J에게 향하게 했다. 두근대는 심장은 능동적이었지만, 소심한 나의 행동은 수동적이었다. 첫사랑이 만든 엇박자와 친구를 잃을 수 없다는 두려움은 짝사랑으로 이어졌다. 만나자는 연락 대신 종종 J와 우연히 마주쳤던 버스에 자주 몸을 실었다. 혹시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맨 뒤 두번째 줄에서 아이리버 이어폰을 끼고 앉아서 인사 대신 나를 향해 해사하게 웃고 있는 J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사한 J의 미소를 떠올리며, 근사한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이 이상형이라던 J를 위해서 명문대 합격증을 짠하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수능을 망쳐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재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불쑥 빌린 책을 돌려준다며 J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시 만난 J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에게 해사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며 어떤 위로나, 연민 대신 따뜻한 양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한다는 메모가 적힌 카드와 함께. 어젯밤 내린 함박눈이 내린 서서히 녹고 있는 한낮에, 나는 온 밖을 하얗게 물들이는 함박눈이 남긴 여운 속에서 그 카드와 J의 손처럼 보드라운 감촉의 양말을 내내 꼭 쥐고 있었다. 그날의 온도, 습도, 공기 모두가 여전히 생생하다. 안타깝게도 몇 번의 이사로 그 양말은 잃어버렸지만, 그 시절의 마음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첫사랑은 양말이었다.
*삭스타즈 레터에 실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