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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10. 2021

초심이 없는 것이 초심

초심은 모든 경우에 옳은 것일까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직장으로 출근한 날, 대표이사와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나를 본부장이 호출했다. 첫 출근이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고, 전날까지 12시가 넘도록 인수인계를 하는 바람에 겨우겨우 출근을 한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회의실 테이블에 앉았다.



“직장 생활 얼마나 했다고 했죠?”

“9년 차예요.”

“음 그럼 내 잔소리가 좀 필요할 수도 있겠네”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본부장을 쳐다봤지만, 이미 그 다음 날아올 말을 나는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거 같다.



“초심. 초심 말이야. 첫 직장에 출근했을 때의 그 마음. 이제 좀 오래돼서 잘 생각 안나죠?” 초심이 어땠는가를 묻기 전에 초심이 있었는지를 먼저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독심술이 빈틈없이 들어맞았다고 오해한 본부장은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나도 오래 일하다보니까 자꾸 까먹게 돼. 근데 말이야, 초심 그거 되게 좋은 거더라고. 사람을 리셋 시켜줘. 아주 처음처럼 말이야. 뭔가를 몰랐을 때 성심성의껏 매진하던 그 느낌. 그 느낌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까먹은 초심이라. 그게 뭘까. 아니, 나에게 초심이란 게 있었나?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키면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결국 나의 초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20대 때 썼던 다이어리를 찾았다. 초심을 찾아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남아있는 기억은 대부분 파편들이었고, 그 때의 감정과 느낌만 남아서 정작 내가 어떤 내용으로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 더미속에서 꽤 오래된 다이어리를 들춰봤다. 뭐라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생각처럼 성실한 인간이 아니었다.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체로 휘갈겨 쓰여진 쪽지를 발견했다. 네다섯 줄 정도의 분량이었고, 일기라고 하기도 뭐한 그냥 심정을 토해내듯 내뱉어 놓은 글이었다. “나의 이십대 절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글의 첫문장이었다. 나는 절박했었다. 그 때 나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취업을 했는데, 나는 그때 그 절박함이 끝났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내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거라 믿었던 것 같다.



절박의 지옥에서 탈출한 기쁨의 유효기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어떤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초심,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나에 대한 믿음. 함정이었다. 굳이 초심을 찾자면, 나의 초심은 처참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주 간단한 작업마저도 쩔쩔매는 사람이었다. 나의 평판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그 시선을 다시 스스로에게 투영시켰다. 남이 오해를 하거나 잘못 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부족했고, 부족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거겠지. 처음으로 가졌던 나의 초심은 처참함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나는 다시 초심이라는 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초심을 잃지 말아라” 혹은 “초심을 되찾자”는 말 속에는 초심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초심이 모든 순간에 옳은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초심, 그러니까 처음의 마음이라는 것은 내가 부딪혀야 할 세계를 모른 채로 내가 가지는 어떤 이상향에 가깝다. 그 무모한 마음이 무조건 옳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좋은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걸까.



돌이켜보면 인생의 처음은, 대부분 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겨울이 되면 온수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자취방에서 시작한 첫 독립이 그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로 수많은 상처와 흑역사를 남기고 사라진 첫 연애가 그랬고, 첫 섹스가 그랬고, 첫 직장, 첫 사랑이 모두 그러했다.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로 막연히 기대하는 일을 그만둔 것도 그래서였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나의 “처음”에서 배웠다.



인생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혹은 너무 익숙해서 권태로움을 느낄 때, 내가 살아있는 것을 감각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대부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주문을 외운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할까? 아무것도 모르고 의욕만 가득 찼던 그 때로 적어도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약간은 권태롭고, 약간은 무기력하고, 또 가끔은 삶이라는 것이 끝나지 않는 쳇바퀴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권태로워 소중한 평화를 깨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히 나아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20대 때의 나는 대부분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 똑똑한 사람, 돈을 많이 번 사람, 인기 있는 사람, 얼굴이 예쁘고 날씬한 사람 등등.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계산하지 않는 것, 후회하지 않는 것, 미리 짐작하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 순간으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지 않는 것. 내가 못하는 것들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것. 멋지고 아름답지만 절대 가닿을 수 없었던 세계를, 스스로를 깎고 잘라내고 닦아내면서 어느 정도 살만한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제대로 알 때, 나만의 것들이 생기는 게임인지도 모른다.



내가 첫 직장에서 막연히 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일들이 채 일주일도 안되어 와장창 박살이 난 것처럼, 어쩌면 초심이라는 것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 막연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제대로 깨어야지만 그 다음의 진짜 세계가 열리는 것 아닐까. 지금 나에게 가져야 할 초심이 있다면, 그건 매순간의 마음이고, 매 순간의 초심일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 이 순간을 다시 되돌려야 할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돌아가야 할 초심 같은 것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초심은 금요일에 퇴근하고 정말 개피곤해서 죽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붙잡고 키보드를 뚜들겨대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다. 나는 지금의 최선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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