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일 Sep 16. 2021

아무튼, 숏컷

-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 하던대로 해주세요. 아, 앞머리는 좀 더 길게요.

- 지난번에 짧았어요?

- 쪼끔?

그리고 우리는 웃었다. 나는 사실 내향적인 성격이고, 낯도 많이 가린다. 말할 것도 없이 낯선 사람과 스몰토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아드레날린은 가장 활발하게 분비된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극도로 긴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심호흡과 함께 말을 꺼냈다.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그때 내 머리는 어깨를 지나 가슴께에 닿아 있었다.

- 얼마나요?

- 여기...이 사진처럼요.

주섬주섬 준비해 간 사진을 들이밀었다. 원장님은 놀란 눈치로 물었다. ‘괜찮겠어요?’ 무슨 말일까. 못생겨지는 게 괜찮냐는 말일까. 그러나 이미 수십번도 더 시뮬레이션을 해 본 상황이었다. 나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리고 커트가 시작됐다. 길었던 머리를 귀 밑까지 댕강 자르고, 모양을 다듬는 일이 시작됐다. 거울 안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왜 이렇게 머리를 짧게 자르냐고,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오는 원장님에게 나는 대답했다. 그냥, 귀찮아서요.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사실 이유는 있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원장님과 스몰토크가 가능한 사이가 되었다. 짧은 머리는 못해도 한 달에 한번은 미용실에 가야하기 때문에, 원장님과 나는 그동안 12번 정도의 짧고도 긴 만남을 가진 셈이다.

나는 그동안 원장님에게 여러 가지 스타일을 주문했다. 귀를 파고 싶은데... 파마를 하고 싶은데.. 염색을 하고 싶은데.. 그럼 원장님은 슬쩍 웃는다. 대부분 비슷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사람과는 달리, 나는 매번 갈 때마다 다른 스타일을 주문했으니, 내가 신기하게 느껴졌던 걸까. 한번은 탈색이 하고 싶다며 남자 아이돌 사진을 보여주니, 원장님 왈. 어..지금 약간 박수홍 느낌 아니에요? 순간 빵터졌다. 원장님은 나의 나이를 대충 안다. 뒤늦게 바람 들어서 하고 싶은 거 다해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실 틀린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중학생 이후 줄 곧 긴 머리였다. 그 이후 단발머리조차 시도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라고 믿었으니까. 특히나 옆 광대가 있고 턱이 각이 져 있는 나 같은 얼굴은 긴 머리로 얼굴 옆선을 가려주지 않으면 큰 일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도대체 왜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긴 머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같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마가 넓으니까 앞머리가 있어야 했고, 늘 가슴께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풀고 다녔다. 이것이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을 내가 자처할수록 사회는 더 강하게 여성성을 압박했다. 더 예뻐야 해, 날씬해야 해, 여성적인 매력이 있어야 돼. 도대체 여성적인 게 뭔데?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왜 여성성을 입어야만 여성이 되는 거지? 아이러니 한 건,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을 수행하면 할수록 더 쉽게 대상화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더이상 여성성을 입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졌다.

사실 긴 머리 때문에 불편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매일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그 머리를 예쁘게 정돈하기 위해 스타일링에 쏟아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 뛰거나 매달리거나 하는 격한 운동을 할 때도, 고개를 숙이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긴 머리카락은 늘 나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밥을 먹거나 무언가를 집중해서 해야 할 땐 꼭 머리끈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나의 손목에는 항상 머리끈이 팔찌처럼 채워져 있었다. 아름다움을 전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걸까. 악세서리처럼 보였던 팔목의 머리끈이 수갑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머리를 자르기는 쉽지 않았다. 우습게도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짧은 머리가 어울리지 않을까봐'였다. 나는 그 오래된 코르셋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자를 결심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못생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좀 못생겨지면 어때서. 아름다움이 사라진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게 아니야. 세상 안 무너져. 수십, 수백번 되뇌었다. 그리고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자르고 나자 화장도 어색하게 느껴져서 저절로 하지 않게 되었다. 머리가 짧으니 치마와 원피스도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져 모두 버리거나 친구에게 줘버렸다. 나는 이제 불편한 것들은 입지 않고, 바르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긴 머리를 선택한다면, 그건 선택이 될 수 있겠지. 선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전제되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 나의 짧은 머리도 처음의 신념과 달리 지금은 진짜 선택이 되어가고 있다. 이 머리가 ‘진짜’ 좋아졌으니까. 예상보다 얼굴과의 조합이 나쁘지 않은 편(?)이고, 파마, 염색, 새로운 스타일 등등 하고 싶었던 것을 정말 자유롭게 시도해볼 수 있다. 머리가 짧으니까 비용도 저렴하고 시간도 많이 안 들고, 맘에 안들면 한 달 뒤에 잘라내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편리하다. 맨투맨에 캡모자를 뒤집어쓰고 나가면 가끔 어르신들이 “여자예요?”하고 물어본다. 머리가 짧으니까 남자랑 헷갈릴 때가 있긴 하나보다.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그 수많은 범죄에서 가끔 비켜갈 수 있다는 거니까, 차라리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리하여, 앞으로도 숏컷길만 걸을 예정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석에 반대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