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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Oct 24. 2021

나의 자매들에게

영화<윤희에게>

'저는 요절을 꿈꿔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건가? 그 선생님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죽음이 생경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나는 요즘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런 날들은 내 인생에 별로 없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손은 핸들에, 시선은 전방에 둔 채로 나는 조수석에 앉은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냥...그냥요' 그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모르는, 혹은 몰라야만 하는 확고한 이유가 있을거라 짐작했지만 이유를 캐묻는 대신 나는 묻지도 않은 내 얘기를 했다. 미처 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추궁하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 역시 이전에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늙은 여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저도 예전에 늙는 것을 참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저 서른될 때 진짜 우울했거든요. 이제 눈가에 주름도 생길거고, 피부도 탄력을 잃을거고, 살이찌면 빼는 게 지금보다 두 세배는 힘들 테니까. 끔찍하지 않아요? 지금이 가장 베스트라는 것,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거."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들었던 것인지, 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죽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늙은 여자가 되는 것이 죽음보다 끔찍했던 것이다.


여자가 늙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세상은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티비에는 늘 젊고 예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등장했고, 그게 아니라면 그 아름다운 여성의 구질구질한 친정 엄마나 막돼먹은 시어머니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늙은 여자는 엄마이거나, 남편의 엄마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세계금융위기에 발맞춰 서점 가판대에 자기계발서가 빽빽히 전시되었는데, 성공을 이야기하는 여성조차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삼십대 중후반이었다. 성공한, 멋있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이든 여성을 어디에서도 나는 본 기억이 없었다. 여성이란 존재는 늙는 동시에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없었다. 창밖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살아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내일 내가 당장 사라져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딱히 삶이 고되거나 힘든 일이 없는데도 항상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나의 20대를 떠올렸다. 그제서야 알았다. 이게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왜 늘 사라지고 싶었을까.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들었을까.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쥰의 편지로 시작하는 <윤희에게>에서 가장 뇌리에 깊게 박혔던 것은, 바로 이 대사였다. 계속해서 참고 버티는 윤희의 고된 얼굴. 영화는 그런 윤희의 얼굴을 집요하게 비춘다. 그런 윤희가 잠시 뒤돌아 얼굴을 숨기는 순간은 담배를 태우는 시간.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삶. 그렇게 윤희는 남겨진 인생이 '벌'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역시나 "참을 수 없음"을 느끼지만 이미 참고 견디는 삶에 익숙해진 쥰. 어쩌면 이 두 명의 여성에게 인생은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버티고 견디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도, 내가 원하는 인생을 찾을 수도 없는 이미 결론이 맺어진 삶. 가끔 죽음보다 못한 삶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었다. 나는 아마도, 이 영화에 미처 담기지 못한 두 여성의 과거가 그러했으리라 추측한다. 참고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삶. 내 존재를 지속적으로 감춰야만 지속되는 삶. 아마 20대의 내가 계속 사라지고 싶었던 이유도 같은 이유였기 때문은 아닐까.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이 삶 전체를 의심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더 참을 수 있겠냐고, 이런 삶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쥰의 질문에 용기를 내고 싶다고 마침내 응답하는 윤희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나는 사랑보다 더 오래되고 그래서 더 진한 우정을 느꼈다. 끊임없는 불안에 늘 응답해준 것은 사랑 아닌 더 깊은 우정이었던 것처럼, 오랜 세월을 견디고 마침내 서로에게 가닿은 우정을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의 삶을 응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우정이라 믿는다. 유효기간이 없는 사랑. 그래서 지속적인 사랑. 끊임없이 곁에서 삶을 돌봐주고 지켜봐주는 사랑.


몇 번의 연애, 그리고 사랑이 지나갔지만 결국 남은 것은 늘 상처뿐인 몸과 마음이었다. 그 시기의 나를 돌보아준 것도 곁에 있는 나의 자매들이었다. 고된 인생의 우여 곡절을 나와 함께 겪은,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 동반자인 우리 친언니, 결단코 이 사람을 얻은 것이 내 생애 가장 큰 성취라고 말할 수 있는 S언니, 20대에서부터 30대까지 불안해하지 않고 나이 먹는 법에 대해 늘 토론하는 J, 다시 회생될 수 없을거라 믿었던 관계를 회생시키고 이렇게 이어나가는 관계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동생 H, 그리고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까지.


몇 년 전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 썼다.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건조하게 쓴 글이었는데, 내가 낭독을 마치자 그 공간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울고 있었다. 하나 둘 글이 인쇄된 A4용지를 들어서 황급히 얼굴을 가리던 여성 동료의 모습들을, 눈에 물기가 가득하던 그 표정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동시에 앞으로 살면서 나는 절대 이 눈빛을,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직장 후배 에피소드부터 영화 <윤희에게>까지 참 멀리도 돌아왔는데 그러니까 결국 이 글은 나의 자매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다. 당신들 덕분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도 사라지지 말고 같이 잘 살아보자고. 늙어서 더 멋진 여성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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